거룩한 기독교적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거룩한 기독교의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재물은 너무나 위대하고 귀중하여 모든 인간의 개념을 능가합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으며 하나님 자신과 가장 긴밀한 결합, 소유, 그리고 즐거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소망합니다. 즉, 우리는 죄의 용서와 우리가 복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좋은 것들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복을 주시고, 그것을 성취하는 데 필요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확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그분의 목적의 불변성을 더욱 확실히 보여 주시기를 원하시어 맹세로 보증인이 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불변한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도피한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는 데 큰 격려를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6:17-18).
그러면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러한 약속은 절대적으로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히 강력하고, 친절하며, 신실하며, 자신의 말씀을 지키시고 약속하신 것을 주실 수 있고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님께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 (창세기 18:14)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사 가브리엘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루카 1:3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주실 수 있고 주실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이나 주저함이 없으며, 마귀도, 교만한 세상도, 타락한 인간 본성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전능함을 감안했을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의 투쟁과 고난 속에서도 항상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얻었으며,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보존하시리라" (딤후 4:18)는 말로 이를 확증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친절하고 자비로우시다. 즉,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이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시편 145편에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 주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선하시고 그 모든 일에 자비로우시다." (시편 145:8-9)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창조 이래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이고, 특별한 증거는 때가 차서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써 인간이 구원받고 축복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확증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그러므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선하심은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위한 확실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신실함은 거룩한 가톨릭 희망을 더욱 강화합니다. 하느님은 그 희망을 통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말씀을 지키시며 아무도 자신의 약속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확증하듯이: "우리가 신실하지 않더라도 그는 신실하시니, 그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니라" (딤후 2:13).
하느님은 자신의 말씀을 지키시며 아무도 자신의 약속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확증하듯이: "우리가 신실하지 않더라도 그는 신실하시니, 그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니라" (딤후 2:13).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겠느냐?" (로마서 3:3)
이러한 하느님의 신실함은 성도들에게 삶의 모든 폭풍 속에서도 힘과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그들의 거룩한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결코 흔들리지 않도록 보장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통해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확실히 하나님의 전능함, 선함, 신실함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전능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확실히 주실 수 있고, 선함으로 인해 뜻하실 수 있으며, 신실함으로 인해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바라보면서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주님의 공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며,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이자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한 것, 즉 독생자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게 하셨을 때, 하나님의 약속이 진지한지 의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랑과 열망을 더 분명하게 나타내실 수 있었을까요?
인간은 죄인이며 영원한 저주를 받을 만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는 항상 하나님께 빚을 지고 영원한 저주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빚을 스스로 지고 완전히 파괴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의 귀중한 피는 그가 인간을 위해 지불한 값입니다. 이 행위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화해시키시고, 그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행복한 위치에 두셨는데, 이는 그의 첫 조상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전에 있었던 위치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이시며, 가장 효과적으로 그를 위해 중재하시고, 그의 죄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의 아버지께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공로의 부를 끊임없이 바치십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대표와 상관없이,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결코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이 행복은 저절로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받아야 하며 구원받기 위해 끝까지 그것을 견뎌야 합니다.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구원의 두려움은 우리가 인간적인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두려움에 대해 경고합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라" (잠언 3:7).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구원의 두려움은 우리가 인간적인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두려움에 대해 경고합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라" (잠언 3:7).
"두렵고 떨면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너희가 외국에 머무는 동안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7)
성인들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거룩한 두려움을 느낀 것은 바로 이러한 경고와 그들의 인간적인 약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우리의 필멸의 육신에 있는 한 의무가 있고 희망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라고 희망해야 하며,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 편에서 할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우리의 두려움을 완화시켜 낙담하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구원하고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의 희망을 조절하여 오만해지지 않도록 합니다.
이런 식으로 희망하고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항상 천국에서 행복과 영원한 삶을 성취하는 데 필요하고 옳은 일을 할 것입니다. 아멘!
이런 식으로 희망하고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항상 천국에서 행복과 영원한 삶을 성취하는 데 필요하고 옳은 일을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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