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djelja, 23. veljače 2025.

거룩한 정교회 기독교 신앙 고백에 있어서 장애물로서의 인간적 고려

 

 

거룩한 기독교 신앙 고백에 대한 장애물로서의 인간적 고려

거룩한 기독교 신앙 고백에 대한 장애물로서의 인간적 고려



  오늘날 정교회 신자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는, 거룩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 중 하나가 의지의 약함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소위 인간적 배려입니다!
  즉, 오늘날 많은 정교회 신자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거룩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높은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밀리에 그것을 고백합니다. 그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악한 세상에서 비웃음과 조롱,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비밀리에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증언할 용기가 없고, 오히려 무기를 던지고 적의 손에 항복하는 비겁한 군인들과 같다. 아니, 의지가 약해져서 종교적 방치에 빠져 거룩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배교하는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인간의 조롱이나 비웃음, 또는 가치 없고 전혀 존중받아서는 안 될 발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며,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거나 증거할 용기가 없습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그의 거룩한 신앙에서 돌려놓는 데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실패할 때, 그는 대체로 인간적인 배려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이용하여 성공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활동을 폭로하려면 다음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배려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성보다 인간의 고려가 훨씬 더 어리석은 일인가?
  신성한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에 대한 배려는 중대한 죄입니까?

인간의 배려는 무엇   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참된 종교 생활과 관련된 인간적 고려는 악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항상 사람을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처럼, 선을 놓치거나 자신의 감정과 신념에 반하는 악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적 배려의 노예라고 불릴 수 있으며, 오로지 악한 사람에 대한 배려나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지 않고  ,  공개적인 교회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거룩한 정교회의 계명을 어기고, 모든 기회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사제, 거룩한 교회의 다른 종들을 비판하고, 자신을 자유사상가로 내세우고 신앙이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완전하고 확고한 신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신자로서 주목을 끌고 심판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렇게 합니다. 그는 못된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를 둘러싼 못된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이성보다 인간의 고려가 훨씬 더 어리석은 일인가?

  많은 정교회 신자들이 종교적 의무와 종교 활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공허하고 악의적이며, 오히려 어리석은 인간의 말과 속담, 무가치하고 우스꽝스럽고 조롱하는 술책으로, 합리적으로 볼 때 가치 있거나 합리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적인 배려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의지와 자유를 앗아가고, 그의 손을 사슬로 묶고, 그를 비참한 노예로 만든다. 광기의 정점은 자기 자신을 사로잡아 자신의 독립성과 의지로부터 해방시키고, 헛된 말이나 악의적이거나 어리석은 말이나 조롱 하나에도 겁먹은 채 적의 손에 겁쟁이처럼 항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적인 고려 사항에 사로잡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큰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이며, 자신의 비이성과 분별력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성한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에 대한 배려는 중대한 죄입니까?

  하나님과 관련하여 인간의 배려는 중대한 죄입니다. 즉, 그것은 거룩한 기독교 신앙에서 떨어진 사람의 죄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에 해를 끼치고, 하나님의 위엄에 큰 모욕을 안겨줍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떨어진 정교회 신자는 인간적 고려의 노예가 되며, 이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외적인 존경을 거부하고 비밀리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데 만족합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신의 위엄에 큰 모욕을 안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을 비밀스러운 존경만을 받을 만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비난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 이렇게 행동하며, 자신이 공개적으로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눈에 악한 행동으로 보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알다시피, 정교회  기독교인  의 의무는 신을 무조건적으로 숭배하고 영혼과 육체로 그분께 존경심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권위와 뜻에 복종하고, 그의 말씀과 가르침을 듣고, 그의 거룩한 법을 수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적 배려에 노예가 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는가?
  그는 주변의 악한 사람들의 비난을 멸시하기는커녕,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명예가 손상될까 두려워 오류에 빠져 거룩한 기독교 신앙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영혼에 큰 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에 심각한 모욕을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인하고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배려만큼 위험한 악과 큰 죄의 근원은 없다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거룩한 기독교 신앙으로부터의 전반적인 배교로 이어질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배교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모든 정교회 기독교인은 자신에게서 인간적 고려를 무조건적으로 제거하고, 그것이 야기할 수 있는 두려움을 극복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순수하고 거룩하고 유일하고 참되고 신성한 정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녀가 소유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모든 사람 앞에서 담대하고 두려움 없이 그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분명한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10:32-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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