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믿음은 그리스도 안으로의 세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도 있습니다. 거룩한 세례는 완전하며 우리에게 완전함을 전달하지만,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2. 세례 후에도 여전히 죄에 속해 있다면 세례가 불완전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계명을 소홀히 하고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거한다는 뜻입니다. 세례 후에 하나님도 사탄도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세례에서 우리는 기록된 대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신비롭게 해방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였느니라 (롬 8:2).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분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우리는 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원수에게 사로잡힙니다.3. 사람은 세례를 받았지만 자기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곳에 거합니다. 자기 통치 곧 그의 자유가 강요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금욕을 행하는 자는 천국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성경(마태복음 11:12)은 사람의 뜻을 말씀하신 것으로, 세례를 받은 후 각자가 악에 기울지 않고 선에 인내하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킬 힘을 받은 자들에게 주님은 믿는 자로서 그 안에서 금욕을 행하여 돌아서지 않도록 명령하십니다.
4. 금욕은 계명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계명입니다. 계명 밖의 금욕을 보여 주십시오. 기도를 가리키면 계명입니다. 생각을 버리는 것을 언급하면 다시 냉정함, 즉 경계하고 근면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금식과 철야를 언급하면 다시 계명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을 언급하면 자신을 포기하라는 계명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어떤 금욕적 덕행을 언급하든 계명만 언급하는 것입니다. 금욕을 행하는 목표는 계명을 온전히 헌신적으로 이행하는 것입니다.5
. 거룩한 세례는 회개와 마찬가지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완벽하게 해방됩니다.편견으로 다시 묶이거나 계명을 지킴으로써 자유를 유지하는 것은 자유 의지의 문제입니다.죄악적인 쾌락에 대한 생각을 유지하는 원인은 강요가 아니라 자유로운 편애에서 발견됩니다.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생각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고후 10:4).교활한 생각을 내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입니다.죄는 생각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의 우호적인 대화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그것에 집착합니까?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미워하는 것이 오랫동안 우리 마음에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의 악한 참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 세례를 받은 후에 우리가 계명을 지키지 않을 때, 우리는 할 수 있지만, 죄가 우리를 지배합니다. 즉, 우리는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죄의 노예가 됩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향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기 의지의 죄를 제거하실 때까지 말입니다.
7. 여러분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었고(갈라디아서 3:27), 생각을 내쫓을 수 있는 능력과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고후 10:4).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첫 번째 공격에서 그것을 내쫓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불신 때문에 정욕을 품고 있고, 그것에 동의하고 합류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행동은 여러분 자신에게 죄가 됩니다.
8. 때때로 우리의 동의 없이, 강도처럼 부끄럽고 증오스러운 생각이 예기치 않게 우리를 공격하고 강제로 우리의 마음을 가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즉, 세례를 받은 후에 우리는 행동으로 실행하지 않았지만 그 악한 생각에 우리 자신을 내주었거나, 우리 자신의 의지로 악의 씨앗을 우리 자신 안에 간직하여 교활한 악마가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교활한 씨앗으로 우리를 붙잡아 두는 자는 우리가 그것을 버릴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악을 행함으로써 우리 안에 거하는 부끄러운 생각은 우리가 회개를 요구하는 노력을 하나님께 바칠 때 쫓겨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도하지 않고 방해하는 생각은 당신이 탓해야 합니다. 당신이 처음에, 첫 접촉에서 그것을 몰아내지 않고 마음에서 깨끗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그 힘이 있었지만, 당신은 기꺼이 그것에 말했지만 행동으로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랜 지인이자 친구에게 온 것처럼 따뜻한 곳에 왔습니다.
9. 당신의 마음에 도움이 보이면, 그것은 외부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세례 때 신비롭게 당신에게 주어진 은혜가 작용했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그 생각을 미워하고 그것에서 자신을 분리할 정도로 작용했습니다.
10. 세례의 은혜로 우리를 모든 폭력에서 구해 주신 주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생각들이 우리 마음에 기어드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미운 어떤 생각들은 즉시 제거되고, 사랑하는 어떤 생각들은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모두 격려됩니다. 즉, 은혜를 위한 노동이나 자기 만족을 위한 생각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격려됩니다.
11. 일종의 사악한 친족 관계처럼, 우리의 정욕과 생각의 공격은 서로 함께 작용합니다. 한 생각은 애인 안에 머물러 있으면 이웃에게 넘겨줍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첫 번째 생각에 강하게 이끌리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번째 생각에 이끌립니다.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누가 교만함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잠을 충분히 자고 쾌락에 빠져 있다면 누가 음행에 대한 생각에 압도당하지 않겠습니까? 탐욕에 빠져 있다면 누가 무자비함에 얽매이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즐기는 사람이 어떻게 짜증과 분노를 피할 수 있겠는가?
12. 그리고 은혜를 받은 후에 우리가 육신에 따라 행할 것인지 영에 따라 행할 것인지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칭찬을 사랑하고 육신을 기쁘게 하는 자는 영에 따라 행할 수 없고, 내적으로 미래를 현재보다 선호하는 육신에 따라 사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인간의 칭찬과 육신의 쾌락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 없이도 우리 안에 교활한 생각을 일으킬 것이고, 우리는 주님께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을 완전한 증오로 미워합니다. 그들은 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시편 138:22).
13.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통해 그들 안에 은밀하게 사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 다음 계명을 지키는 정도와 생각의 소망에 따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 신자들에게 계시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받아야 할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7:38-39).
14.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사람은 죄의 영향 아래 빠지고 각자는 자신을 유혹하고 속이는 자신의 욕망에 의해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 욕망이 잉태되면 죄를 낳고 죄가 이루어지면 사망을 낳습니다(야고보 1:14-15). 자신의 정욕에서 생각의 죄가 태어나고 그것에서 상응하는 행동의 수행이 나옵니다. 누군가가 세례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즉시 죄가 그를 사로잡습니다.
15. 굳게 믿는 자에게는 세례 때 즉시 성령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그를 근심하게 하고 우리 자신 안에서 그를 소멸시킵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성령을 끄지 말고 (살전 5:19),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으로 여러분은 구원의 날을 위하여 인치를 받았습니다 (에베소 4:30). 이것은 세례를 받고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이 그로 인해 흔들리지 않고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은사를 통해 우리는 모든 계명을 성취할 수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의 신비로운 영접을 받은 후에도 계명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죄의 영향으로 계명을 버린 것과 비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있지만 태만함으로 인해 일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빨리 또는 점진적으로 완전해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믿고 그의 계명을 성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성취하는 정도에 따라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그의 열매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온유, 착함, 믿음, 온유, 절제 (갈라디아서 5:22-23).
16. 그러므로 신자 중에 누구든지 계명에 따라, 계명에 따라 살면서 어떤 영적 활동을 습득했다면, 그는 이미 그런 일을 할 힘을 받았다고 믿어야 한다. 그는 세례에서 성령의 은총, 즉 모든 선의 원인, 비밀스럽고 영적인 덕뿐만 아니라 공적인 덕도 받았기 때문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기 힘만으로 어떤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말씀에서 말했듯이, 선한 사람은 선한 보물에서 선을 내는 것이지(마태복음 12:35)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물이란 신자들의 마음 속에 숨겨진 성령을 의미한다.
17.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세례 때부터 그리스도를 감추어 두셨고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라면, 그의 마음에 거하시며 온갖 조심으로 그를 보호하십니다(잠언 4:23).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셔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원하고 행하게 하십니다(빌립보서 2:13). 사도는 "자유의지"라는 말로 덕에 대한 선한 의지는 우리의 자유에 달려 있지만, 덕의 역사나 죄의 제거는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복음 15:5)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우리의 몫도 있습니다.
18. 각 사람의 왕족의 마음은 마음의 숨겨진 성전에서 먼저 그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선하고 온화한 의도를 받아 덕행의 삶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다시 온화한 생각을 통해 그 의도를 자신에게 주신 그리스도께 이끕니다.
19. 부활 후에 신자들이 받을 재물은 위에 있는 반면, 그들의 약속과 첫 열매는 이미 영적으로 그들의 마음 속에서 일하고 있어서,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모든 현재의 것들을 멸시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느니라 "(히 12:22)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즉, 거룩한 세례를 통해 우리 모두는 이것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굳게 믿고, 매일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죽는 사람, 즉 현재의 모든 생각 위에 서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얻는 방법만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도 이것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잡으신 것처럼 그것을 붙잡기 위해 힘씁니다 (빌 3:12). 즉,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기 위해 힘씁니다. 이 사랑을 얻은 후 그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육신의 괴로움도, 창조물의 아름다움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떠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 (롬 8:35).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거기에, 즉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20.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성령의 첫 열매가 있다고 말하면서(롬 8:23) 우리의 수용 가능성의 척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계명을 통해서만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태양이 완전하여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 단순하며 동등하게 유익한 역사를 쏟아내는 것처럼, 각자는 눈의 순결의 척도에 따라 빛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세례를 통해 그를 믿는 사람들이 그의 모든 역사와 은사를 받을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역사하지는 않지만 계명의 성취, 선행의 행함,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척도에 따라 각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21. 사탄의 애착은 교활한 것, 즉 행동을 생각을 통해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다가옵니다. 마음이 마음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온전한 주의를 기울여 지키라는 계명(잠언 4:23)과 우리 안에 있는 천국을 기도하고 구하라는 계명에서 벗어나면 마귀의 집착과 교활한 조언은 즉시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고 모든 악한 생각을 강제로 유도하여 좋은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내적 성향, 즉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우리의 첫 번째 생각에 자신의 왜곡된 가르침을 균일하게 심을 수 있는 힘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조언이나 하나님의 계명은 서로 반대입니다.
22. 미운 사람에 대한 생각이 안에 머물고 집착하는 것은 이전의 수용에 달려 있지 우리의 새로운 성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부사는 단조로운 곳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데, 마음의 불쾌함이 그것이 발전하여 열정으로 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이 싫어하는 미개발된 생각은 마음이 풍만하지 않는 한, 마음을 더 넓은 대화로 끌어들일 힘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풍만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면, 단조로운 표상의 모습조차도 더 이상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고, 미래의 선을 기대하는 우리의 양심을 비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23. 마음이 이전 생각에 대한 반대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하느님께 이전의 죄를 고백하면 유혹 자체가 즉시 사라지고 마음을 감시하고 모든 주의를 기울여 기도로 보호할 힘을 되찾으며, 영혼과 육체를 감각의 심연과 불순함의 급류로 밀어넣는 교활한 생각이 더 이상 없는 마음의 완전히 내적이고 평온한 방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세상 지혜의 말과 이미지로 장식된 넓고 넓은 길이 더 이상 없습니다. 이 길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속입니다. 영혼의 순수한 내실과 그리스도의 집은 사도 바울이 언급한 믿음, 소망, 사랑(고전 13:13)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서 정당화되거나 정당화되지 않은 어떤 것도 가져오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랑하고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전에 받아들여진 생각에 이끌리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살피고 내적으로 발전하여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하나님께 따라 사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자신을 둘러싼 생각의 방황과 육체적 쾌락을 외부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살피는 마음으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4. 악의 유혹은 변함없는 본성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며, 사람은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노출되었지만, 그는 그것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의 유혹은 죄도 아니고 의로움도 아니라, 우리 의지의 자유에 대한 시험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허락되어 있으므로, 계명에 기울어지는 자들은 그들의 신실함에 대한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있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들은 그들의 불신에 대한 정죄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이 있든 없든 변화할 때마다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평생 유혹을 견뎌내고, 패배하고 승리하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방황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받은 후에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의 날, 모든 것이 요약되고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우리는 정죄를 받거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은 죄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비록 그가 마지못해 단 한 번의 생각으로 우리에게 사물을 보여주지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영적 행동의 힘을 받았고, 첫 번째 생각에서 강제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성향에서 늘어나는 생각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일지는 우리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25. 정욕과 허영심에 어두워져 무지의 심연에 빠진 이래로, 우리의 영혼은 더 이상 성경의 계명이나 자연의 흐름, 경험 많은 사람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생각만을 따른다. 이러한 악의 원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악의 특징인 행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이 주님과 미래의 좋은 것들에 대한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갖는 정도에 따라, 사람은 인간의 영광과 정욕을 멸시하고, 생각을 억제하며, 정욕에 찬 사람보다 훨씬 더 평화롭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과 삶에서 서로 다른 이유이다.
26. 이것을 알라. 주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살피신다는 것을. 교활한 생각이 처음 나타나는 것을 미워하는 자들은 약속하신 대로 즉시 덮어주시고, 많은 생각들이 그들을 대적하여 일어나 그들의 마음과 양심을 더럽히지 않게 하십니다. 반면에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생각의 처음 시작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것을 즐기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로서 다가오는 생각에 압제당할 도움 없이 내버려두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들의 기여를 사랑하고 처음 나타났을 때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몰아내지 않으십니다.
27. 어떤 권위도 우리를 선이나 악으로 강제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유 의지로 섬기는 자, 곧 하나님이든 마귀든, 그는 자신의 영역에 있는 모든 것으로 우리를 재촉합니다.
28. 첫 번째 것들은 생각 없는 두 가지 집착입니다. 인간적인 칭찬과 육체적 쾌락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악이나 덕이 나타나지 않고 오직 우리 의지의 성향, 즉 우리가 무엇에 기울어졌는지만 시험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욕과 고통을 견뎌내기를 원하시고, 마귀는 그 반대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의 애착 때문에 기뻐할 때, 우리는 주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쾌락을 사랑하는 영으로 기울어짐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위의 애착 때문에 슬퍼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울어지고 좁은 길을 사랑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애착은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기울일 수 있도록, 그리고 그분께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으셔서 그들의 마음을 진리로 인도하실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나타나도록 허락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같은 것을 이해하십시오. 인간의 칭찬과 육체의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귀에게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합니다. 마귀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으면, 그들에게 자신의 악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생각에 기뻐하는 만큼, 그는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미워할 때까지 생각을 더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것들을 위해 덕을 배반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서로 대체합니다. 즉, 쾌락을 위해 불명예를 당합니다. 우리가 아무런 슬픔 없이 그것들과 동의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증식시키는 재료를 찾기 시작합니다. 허영심과 쾌락을 위한 재료는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돈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딤전 6:10).
29. 주님은 아담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내가 너를 죽이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을 것이다"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창 2:17). 그리고 일반적으로 주님은 모든 행위,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상응하는 보상이 따르며, 영적 법칙을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명칭이 따른다는 것을 확립하셨습니다.
30. 우리는 동료 신자 중 한 사람을 악하다고 미워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하다고 부끄럽게 여기실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군가의 회개를 거부하고 그를 죄인으로 여긴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죄인으로 거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우리 죄에 대한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 법을 선포하면서, 우리의 입법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리라;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아니하리라;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가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6:37). 이 법을 알고 사도 바울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곧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롬 2:1). 이 사실을 알고 선지자도 하나님께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시 61:13). 또 다른 선지자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복수는 내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셨다 (신 32:35).
31. 선지자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 자선으로 죄를 속하고 관대함으로 죄악을 속하라 (다니엘 4:24). 하지만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관대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돈이 없지만 욕망은 있습니다. 그것을 버리면 선을 행할 것입니다. 당신은 육체적인 손으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올바른 자유 의지로 선을 행하십시오. " 만일 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용서하라 (눅 17:3), 주님의 말씀대로. 그러면 이것은 당신에게 큰 자선을 나타낼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하면, 우리 자신도 우리와 관련된 모든 죄에 대해 이와 비슷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루카 6,37)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이 궁핍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큰 일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우리에게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죄 사함을 받는 데 더욱 중요합니다. 영혼은 본성상 몸보다 더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죄 사함을 자주 받고, 그로 인해 여기에서 아무런 악을 겪지 않으면서 이웃을 이 선물에 참여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인에게서 만 달란트의 빚을 용서받았지만 이웃의 빚을 백 데나리온만 용서하지 않은 그 사악한 종과 같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율법에 따라 판단할 때,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간청하였으므로 내가 네 모든 빚을 용서해 주었다. 내가 네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 종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자 그의 주인은 노하여 그를 고문하는 자들에게 넘겨서 그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다 . 그리고 이로부터 결론을 내리시어 이르시되, 만일 네가 네 형제의 허물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라 (마태복음 18:32-35)고 하셨다.
32.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부자들은 화가 있도다 (루카복음 6:24).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모든 부자들을 비난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를 처분하는 법을 참으로 알고 성경에 따라 이 세상에서 백 배를 받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축복받은 아브라함과 의로운 욥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비로워서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더욱 부유해졌다. 그는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탐욕스러운 본성을 가지고 하느님의 선물을 횡령하고 이웃에게 재산이나 하느님의 다양한 선물에서 자비를 베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부가 소유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통해 얻은 이익과 그 어머니인 무자비함이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확고하게 믿고 현재의 재화를 완전히 포기하는 사람들은 이를 피합니다.그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창조물을 부당하게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라고 명령하시고 그들의 모든 일상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게다가 어떤 사람은 소유물이 없어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어떤 말씀이나 지식을 탐욕스럽게 붙잡고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비록 그가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받았더라도 말입니다
.33. 죄를 지은 사람들은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죄받는 것은 악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진리 자체가 증거합니다. 주 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고난을 받았으니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많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멸망하리라.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많다고 생각하느냐?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멸망하리라 (눅 13:2-5).우리가 회개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정죄받는 것을 보느냐? 34. 회개는 시간이나 특정한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에 비례합니다.어떤 계명은 더 일반적이며 많은 개별적인 계명을 포함합니다.그들은 한 번에 여러 가지 악의 조합을 끊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 누구든지 네게 구하면 주고, 네 것을 빼앗는 자에게는 요구하지 말라" (누가복음 6:30)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서 빌리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라 (마태복음 5:42). 이것들은 개별적인 계명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계명은 다음과 같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마태복음 19:21) 그리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0:38). 십자가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의 고통을 의미하거나 고려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 주고 십자가를 지신 그분은 위의 모든 계명을 한꺼번에 성취하셨다. 같은 방식으로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분노와 의심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모든 곳에서 기도하기를 원한다 (딤전 2:8). 반면 주님은 일반적으로 말씀하신다. 네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태복음 6:6) 그리고 다시 말씀하신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전서 5:17).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경우에 기도하라는 명령을 성취한다. 또한 간음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과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고,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치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스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라 (고후 10:5). 생각을 무너뜨리는 자는 앞서 언급한 모든 악에 대한 장벽을 세운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굳게 믿는 자는 일반적인 계명을 강요하며, 가끔 마주치는 개별적인 계명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사역은 다음의 세 가지 미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정화, 끊임없는 기도,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외적으로만 행할 것이 아니라 정신적 행동으로도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랫동안 그 안에서 노력하는 자는 마침내 냉정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일은 우리의 말씀이 이전에 지적했듯이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덕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그것이 항상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죄인이든 의인이든 구원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말입니다.앞서 언급한 덕이 필요하지 않은 완전함은 없습니다.초보자는 그들의 도움으로 경건한 삶에 들어가고, 중급자는 그 안에서 발전하고, 완전한 사람은 그 안에서 확립됩니다.35
.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회개하라 (마태복음 4:17).그러므로 영적이고 진보된 사람조차도 이 필요성을 소홀히 하지 말고 가장 사소한 죄조차도 주의하지 않은 채로 두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죄를 무시하는 자는 곧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19:1). "영적인 사람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지 말라. 그가 그렇게 머물러 있다면 그는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약간의 반대를 허용하고 회개 없이 그것을 고집한다면, 반대는 그에게서 자라나서 끈으로 묶듯이 오랫동안 그를 강제로 끌어당겨 그것과 결합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도를 통해 그것, 즉 악과 싸우게 된다면, 그는 그것을 물리치고 그의 영적 연령 수준에 머물 것이다. 그리고 싸움이 단축되고 기도의 노력이 줄어들어 그를 지배했던 것의 노력이 커짐에 따라 그의 수준에서 떨어지게 된다면, 그는 확실히 다른 정념에 속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점차적으로 각각의 정념에 끌려가서 마침내 그는 하느님의 도움을 박탈당하고 더 큰 죄로 이끌리게 되며, 때로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그를 지배했던 것의 부추김에 의해 그렇게 된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가 악의 시작에 하느님께 기도하여 궁극적인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할 수 없었을까요?" 그리고 나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작은 죄를 소홀히 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것을 자신에게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작은 죄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큰 죄의 준비이자 원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에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을 강화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의 도움으로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을 때, 열정이 그의 의지 없이 강제로 그에게 일어납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이전에 무지로 인해 보호했던 적과 싸우고, 그에 대해 사람들과 논쟁합니다. 때때로, 심지어 주님께서 들으셔도 그는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상상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의 이익을 위해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변덕스러움과 무관심을 아시는 그분은 우리의 곤경에서 우리를 도우셔서, 쉽게 벗어나 다시 부지런히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견뎌내는 것이 필요하며 회개에 머무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36. 너희가 내게 대답하리라.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완전함에 도달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회개가 더 필요하겠는가?"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혜롭게 들으면 그런 사람들도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은 여자를 정욕으로 바라보는 것을 간음으로 여기셨고,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을 살인으로 비유하셨으며, 모든 쓸데없는 말에 대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5:28; 12:36). 눈의 정욕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이며, 이웃에게 이유 없이 분노한 적이 없는 사람이 누구이며, 쓸데없는 말로 자기가 무죄함을 보여 회개할 필요가 없게 한 사람이 누구인가? 지금 그렇지 않더라도 전에는 그랬고, 회개에 관해서는 죽을 때까지 빚진 자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듯이, 이러한 약점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들은 모든 악덕에 대해 성직에 따라 이질적이지만, 성직에 따라 그런 일은 성 바울의 말씀에 따르면 불가능하다. "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의 은혜의 선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롬 3:24). 결국,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더라도 그들 역시 아담의 후손일 것이고, 그들 역시 범법의 죄 아래서 태어났을 것이며, 하나님의 정령에 따라 죽음에 정죄받았을 것이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37.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세상을 지나온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에게서 경건의 신비가 회개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경건을 멸시하지 않는 사람은 정죄받지 않았고, 경건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의롭다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삼손, 사울, 엘리야와 그들의 아들들은 이미 거룩함을 어느 정도 얻었지만, 회개를 소홀히 하여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연의 시간이 끝나고 잔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마귀가 우리와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으므로 회개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적극적인 사랑 없이는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이웃을 위해서도 회개를 제공해야 합니다. 38. 회개가 자비를 구하는 간청이라면, 부자는 "너는 이미 배불리 먹었다"는 말
을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 4:8).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부족함에서 구해야 합니다.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습니다(마 7:8).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용서받는다면, 우리가 부지런히 서로를 도울 때, 온 세상이 회개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은 니네베 사람들을 구원하셨고, 그분을 소홀히 대하는 소돔 사람들을 불에 내주셨습니다. 39.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회개의 위업을 이룬다 해도, 우리는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 왕국에 합당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말하고 듣는 것처럼, 우리는 본성적으로 회개할 의무가 있습니다. 한 번 죽을 만한 사람은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만, 사는 사람은 회개로 인해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죄에서 깨끗해졌습니다. 모든 죄에서가 아니라면, 아담의 범법에서 깨끗해졌습니다. 깨끗해졌으므로 우리는 계명을 받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례를 더럽히고, 옛 죄로부터 깨끗함을 잊는 것입니다(벧후 1:9). 아무도 명령된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더라도 단 하루도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은 정욕을 미워하고 그것을 자극하는 것들을 피함으로써 이전의 자발적인 죄를 비자발적으로 만듭니다. 회개를 제한하는 자는 돌아서서 옛 죄를 새롭게 합니다. 40. 활동적인 삶에서 회개 없이는 우리는 의미 있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며, 또한 회개하려는 의도 그 자체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강요하고 끝까지 회개를 고수하는 사람은 비록 무엇인가에 실수를 하더라도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에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를 악한 세대라고 부릅니다. 그는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회개를 마쳤다고 생각하면서 무지하게 쾌락, 즉 정욕에 집착합니다. 왜냐하면 오만함과 거만함은 정욕이기 때문입니다. 거만한 자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거만하고 멸시하고 교만한 사람은 어떤 일에서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아브 2:5) 마음의 겸손이 완전한 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인 회개를 버리지 마십시오. 신실한 아브라함과 의로운 욥은 자신을 낮추면서 자신을 흙과 재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마음의 겸손의 표시입니다. 세 명의 청년, 참으로 훌륭하고 위대한 순교자 세 명이 타오르는 불 가운데서 고백하며, 자신들이 죄를 지었고 율법을 어겼으며, 비록 완전했지만 옛 악을 회개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노래의 거의 전부가 회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하고 행위에서 완전함을 보인 사람들조차도 죽음까지 회개를 사용했다면, 누가 의로움의 명분으로 자신에게 희망을 두고 회개를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41.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 잘못이 정당한지 여부와 관계없이, 용서의 덕보다 더 큰 덕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를 이긴 죄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면, 우리는 깨어 있고 고통받으며 하느님께 자비를 베푸시고 그러한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언제나, 모든 곳에서, 모든 행동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기뻐하는 것이지 사람들의 다양한 모욕에 슬퍼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단순히 이치 없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고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들어 있으며, 어떤 지식보다 더 본질적이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서는 믿음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나타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용서는 첫째가는 큰 계명의 어머니입니다. 용서를 통해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깨어 있고, 우리 몸을 괴롭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과 내면의 기질이 열리고 그것을 우리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용서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웃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세례에서 신비롭게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우리의 의식과 감각에 민감하고 눈에 띄게 작용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42. 말에 지혜로운 자들은 오직 범인만을 죄인으로 여기지만, 영에 지혜로운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화나게 할 때, 기쁨으로 모욕을 견디지 못한 것을 스스로 책망하고, 불편함이 이전의 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 번째 죄는 두 번째 죄보다 쉽습니다. 마치 자신을 복수하는 자는 자신의 정의의 부족을 위해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견디는 자는 자신이 전에 저지른 악행과 지금 그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43. 이 미덕, 즉 범죄에 대한 용서는 허영심과 쾌락이라는 두 가지 정념에 의해 방해받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에서 그것들을 포기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러한 정념을 극복하기 위해 당신의 의지와 싸우십시오. 그러나 이 싸움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적이며, 인간 중 누구도 우리를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례 때부터 신비롭게 우리 안에 숨겨진 유일한 도우미, 즉 무적이며 모든 것을 아는 그리스도만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그분의 계명을 이행한다면 그분은 이 싸움에서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적들은 앞서 말했듯이 몸과 결합된 쾌락과 당신과 나를 사로잡은 허영입니다. 그들은 이브를 속이고 아담을 속였습니다. 쾌락이 나무를 먹기에 매우 좋고 보기에 좋다고 제시했고, 허영심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 너희는 신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것이다" (창세기 2:5-6).
44. 수도사들은 교회에 어긋나는 의견을 갖지 않지만 사도 바울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르도록 주의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이 마음을 너희 안에 두라.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상을 취하셨느니라 (필립보서 2:5-7). 이런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큰 덕, 곧 마음의 겸손을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에서 이 일을 하라고 명령하시며,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요한복음 6: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고(루가복음 17:21), 그분을 찾고 구하는 자에게는 몸에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을 더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복음 6:33). 주님으로부터 이것을 듣고 믿고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자들을 본성에 따라 행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5. 이 질서를 고수하는 수도사들은 어떻게 타락합니까? 그것을 고수하는 자들이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떠나 허영심과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걱정에 빼앗겨 가장 중요한 것들, 곧 기도와 마음의 겸손을 소홀히 하는 자들이 타락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모든 것을 육체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막지 않고, 단지 기도와 마음의 겸손에서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그는 이 두 가지 없이 행하는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빼앗아갈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몸으로 행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조용한 생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몸이나 생각 중 하나가 시기적절하지 않은 때에 분리된다면, 남은 것은 오직 그 자신의 의지에 자신을 내어놓을 뿐, 하나님께는 내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6. 사도 바울은 우리가 기도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살전 5:17). 동시에 마음의 산만함이 없음을 지적합니다. 이 생활에 동화하지 말고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십시오 (롬 12:2). 우리의 믿음이 약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관심에 따라 고난을 피하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며 우리가 결코 심판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모든 계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여러 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끊임없이 권고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하고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십시오 (엡 6:18).
47. 기도는 다를 수 있다. 하나는 상상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상상하는 동안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을 택하여 세상적인 대화와 직업이 끝난 후에 기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 따라 모든 세상적인 걱정보다 기도를 최대한 선호하는 것이다. 주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알리십시오 (빌 4:6).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흠 없고 냉정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염려를 다 주께 맡기십시오. 그가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벧전 4:7; 5:7). 모든 것이 기도로 확립된다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서는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며 염려하지 마십시오. 또는 무엇을 입을까?...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1; 33). 주님께서 우리를 더 큰 믿음으로 부르시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현세의 모든 걱정을 버리고 궁핍함을 겪지 아니한 사람이 영원한 보물에 관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겠는가? 이것을 계시하시며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작은 것에 충실한 자는 큰 것에도 충실하니라 (누가복음 16:10).
48. 주님은 매일 몸을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하루의 걱정을 끊지 않으셨지만, 오늘을 돌보도록 허락하셨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매우 적절하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명령하셨습니다. 육신을 입은 사람이 육신 생활의 걱정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금욕을 통해 많은 것을 하찮은 것으로 줄일 수는 있지만, 완전히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라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엡 4:13)은 기도보다 여러 가지 봉사를 선호해서는 안 되며, 불필요하게, 그저 그렇게 떠맡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기도라는 명목으로 어떤 필요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자신에게 오는 것을 피하고 거부해서는 안 되며, 기도와 다른 일의 차이를 알고 의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섬겨야 합니다. 달리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에 따르면 한 계명이 다른 계명보다 더 높고 더 중요하다고 믿지 않으며, 예언자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마주치는 모든 계명(시편 118:128)에 따라 인도받지 않을 것입니다.
49.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필요하고 우리에게 맞는 일들은 피할 수 없지만, 우리는 시기상조한 일을 거부하고 그보다 기도를 더 선호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를 큰 지출과 많은 소유물의 축적으로 끌어들이는 일들을 거부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주님 안에서 그것들을 제한하고 그것들의 불필요한 구조를 잘라내는 한, 그만큼 생각은 산만함을 삼가할 것이고, 생각이 상상을 삼가는 한, 그만큼 순수한 기도에 자리를 내주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보일 것입니다. 믿음이 적거나 다른 약함 때문에 이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최대한 진실을 알고, 자신의 힘에 따라 몸을 앞으로 뻗어 자신의 무가치함을 질책해야 합니다.
50. 우리는 소망과 기도로 모든 세상적 걱정을 우리 자신에게서 떨쳐 버리도록 조심합시다. 우리가 이것을 완전히 할 수 없다면,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기도에 대한 우리의 근면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말자. 왜냐하면 자주 빠뜨리는 것에 대해 질책을 받는 것이 완전히 포기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와 필수적인 봉사에 대해 말한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언제 어떤 직업을 기도보다 선호해야 할지 알 수 있는 판단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큰 분별력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적절한 봉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모든 행동을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이러한 필수적이고 필수적인 계명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중 하나가 적절한 때에 다른 것보다 선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모든 봉사는 항상 그런 것이 아니라 적절한 때에 수행되어야 하지만, 기도의 봉사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필수적이지 않은 직업보다 그것을 선호해야 한다. 사도들은 이 차이점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을 봉사에 끌어들이고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식탁을 섬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을 찾아서 우리가 이 직분에 임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의 사역에 전념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행 6:3-5).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기도에 전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섬기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둘 다 빼앗기지 않을 것이고, 더 나은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 중요하거나 필수적인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51. 그러므로 기도의 일을 시작하자. 그리고 우리가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우리는 기도에서 신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뿐만 아니라 확고한 믿음과 거짓 없는 사랑, 원한을 품지 않는 것, 형제에 대한 사랑, 자제력, 인내, 내적 지식, 유혹으로부터의 구원, 은혜의 은사, 진심 어린 고백, 진심 어린 눈물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기도는 열거된 것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견디는 것과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 영적 법에 대한 지식,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지식, 성령의 강림, 영적 보물의 은사, 그리고 하나님께서 신도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 이 세상과 내세에서 모두 제공한다. 한마디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 없이, 마음과 함께 나누이지 않고는, 그리고 마음의 큰 겸손 없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없다.
52. 경건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 죄를 짓지 않는 것, 둘째, 죄를 지은 후에 오는 고난을 겪는 것, 셋째, 오는 고난의 고통이 부족하면 우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하는 적절한 방법으로 여기에서 바로잡히지 않는 것은 확실히 그곳에서 우리에게 심판을 초래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울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시고, 그분 자신이 아시듯이, 전능한 은혜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53. 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열정은 얼마나 기만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지요. 그것은 지혜로운 사람조차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열정의 행동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리고, 이런 이유로 그들은 울고 마음을 낮추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말과 경건의 모습으로 가려져 있어서, 그것에 지배받는 사람들은 그 변덕스러움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54. 성경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어떻게 부인하는지 들어보십시오. 첫째, 선지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의 뼈를 꺾으시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셨기 때문에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였느니라 (시 52:6).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겉으로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엡 6:6),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겠노라 (갈 1:10). 성경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55. 사람을 기쁘게 하는 교활함은 무엇인가? 모든 교활함의 어머니이자 첫 번째는 불신이며, 그 다음으로는 시기, 증오, 악의, 질투, 다툼, 위선, 편애, 겉으로 보이는 봉사, 중상모략, 거짓말,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은 경건함, 그리고 이와 유사한 눈에 띄지 않고 어두운 정욕이 따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어떤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교묘한 말로 칭찬하면서도 그 속에 있는 해악을 감추는 것이다. 원한다면 나는 그들의 교활함을 하나하나 너희에게 드러내 보이겠다. 교활한 사람은 한 사람을 조언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고, 한 사람을 칭찬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이웃을 가르침으로써 자신을 칭찬하고, 정의롭게 판단하기 위해 재판에 참여하지 않고 적에게 복수하고, 아첨으로 폭로하여 꾸짖은 적이 그를 받아들일 때까지 하고, 중상모략을 하지만, 중상을 감추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는 가난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게 하고, 그들에게 그것을 줄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그렇게 할 때, 그는 마치 그들이 스스로 그것을 요청하는 것처럼 그것을 선포합니다. 그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하고, 경험이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겸손하게 말하며, 두 사람 모두로부터 칭찬을 구합니다. 그는 덕이 있는 사람들이 칭찬을 받으면 분노하여 다른 대화를 시작하여 칭찬을 제거합니다. 그는 통치자들이 없을 때는 비난하고, 그들이 있을 때는 그들의 얼굴에 그들을 칭찬합니다. 그는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을 꾸짖을 스승들을 찾습니다. 그는 자신이 너무 현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단순함을 모욕합니다. 그는 동료 인간의 미덕을 무시하고 그들의 잘못을 기억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모든 면에서 시간을 사냥하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며,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데 대한 풍부한 열정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묻는 것으로 자신의 악행을 숨기려고 합니다. 참된 스님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행동합니다. 자비심에서 다른 사람의 악행을 눈감아주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악행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그들이 자신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중상을 받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데 관심이 없고,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때로는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께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상을 기대합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14).
56.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불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행으로 고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이웃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고 용광로 속의 세 청년은 우리에게 이런 사고방식을 가르쳐 주며, 그들이 불 속에 던져진 것은 자신의 죄 때문(단 3:28)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비록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마주보았지만 말입니다. 시므이가 그를 꾸짖었을 때, 거룩한 다윗은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모욕을 당했다고 고백했습니다(왕하 16:11).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은 백성(이스라엘)과 지파(이방인)에게 미래에 그들의 죄에 따라 고난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죄와 고난을 그들에게 계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렇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것저것 말하고 행했기 때문에, 이것저것이 그들에게 닥쳤기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면서, 축복받은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당신의 판단이 의로우심을 깨닫고, 당신이 참으로 나를 낮추셨음을 깨닫습니다 (시 118:75).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나를 어리석은 자들에게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벙어리가 되어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니, 당신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 38:9-10).
57. 우리는 우리의 숨겨진 악한 생각의 신이 보낸 사자로 우리를 책망하는 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생각을 정확하게 살펴보고 스스로를 바로잡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안에 숨겨진 큰 악에 대해 알지 못하며, 모든 단점을 기억하는 것은 완벽한 사람만이 가진 특징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명백한 단점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면, 우리의 생각은 더욱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악의 대부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에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유익을 위해 문제가 닥치도록 허락하시고, 그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선을 베푸신다는 것을 이해합시다. 첫째, 그분은 그 문제를 통해 우리를 은밀히 지배하는 악한 생각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그런 다음, 그 생각이 계시된 후에, 그분은 우리에게 진실하고 거짓 없는 마음의 겸손을 허락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허영으로부터의 구원과 우리 안에 숨겨진 모든 악의 완전한 계시를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믿음과 감사로 우리를 덮치는 고난을 견뎌내지 않는 한, 우리 안에 숨겨진 악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우리가 그것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악한 생각을 거부할 수 없고, 과거의 악으로부터 깨끗해지기를 기도할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얻을 수 없습니다.
58.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왜곡은 언뜻 보기에 우리의 죄와 일치하지 않지만, 영적인 의미에서 그것들은 모든 정의를 보존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실로암의 무너진 탑 아래에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탑을 허물었습니까? 아니면 70년 동안 회개를 위해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이 회개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약탈했습니까? 처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범죄로 잡힌 군인들이 저지른 악행이 아니라 구타로 처벌받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적절한 시기에 회개에 따라 우리에게 닥친 고난으로 처벌받는 것이지, 같은 시기에 같은 일로 처벌받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지연과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를 덮치는 고난의 불일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믿지 않게 됩니다.59. 우리에게 닥친 모든 고난의 범인은 우리 각자의 생각입니다. 나는 말과 행동도 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말과 행동보다 앞서지 않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생각에 돌린다. 생각이 앞서므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이웃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한다. 교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악의에서 생기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생긴다. 교제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우리가 모르는 사람도 받아들이고, 이러한 수용에 문제가 따른다. 성경에서 말했듯이: 친구를 위해 보증하는 자는 원수에게 손을 대는 것이다 (잠언 6:1).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겪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웃에게 보증인이기 때문이다.
60. 악을 받아들이는 것은 비자발적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일어난다: 도둑은 자신이 훔친 사람의 유혹을 스스로 떠맡고 싶어하는 듯하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자신이 훔친 사람에게서 유혹을 받는다; 중상모략하는 자는 자신이 중상모략하는 자에게 유혹을 받는다; 과중하게 요구하는 자는 과중하게 요구하는 자; 중상하는 자는 과중하게 요구하는 자; 멸시하는 자는 멸시하는 자; 유혹하는 자는 유혹하는 자. 그리고 각각을 개별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를 행한 자의 상응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것은 또한 " 의인은 원수가 자기를 위해 마련한 함정에서 벗어나고 악인은 그 함정에 빠진다" (잠언 11:3)고 말하는 성경에서도 증거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이웃을 위해 구덩이를 파는 자는 자기가 거기에 빠지고 남에게 돌을 굴리는 자는 자기에게로 다시 굴러올 것이다 (잠언 26:27). 그리고 다시: 모든 불의는 불의한 자의 품으로 돌아가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의롭다 (잠언 16:33)고 합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러나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입증한다면 우리끼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 불의하신가? (롬 3:5) 고난으로 가르치는 자들뿐 아니라, 생각 없이 그들을 향해 투덜거리는 자들까지도 대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61.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받아들이심을 주셨는데, 그분은 먼저 우리의 영적 연약함을 고쳐 주시고, 그다음에 모든 질병과 연약함을 고쳐 주시고, 그분을 굳게 믿는 자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들의 본성을 정화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허락하셨고,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물려주셨고, 경건함을 가르치셨으며,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성령의 교제를 통해 고난을 허락하셨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미래의 좋은 것들을 허락하셨습니다(고전 2:9). 이런 이유로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시험을 받으시고, 모욕과 조롱과 결박과 배신과 뺨을 맞으시고, 식초와 쓸개를 마시게 하시고, 못으로 찔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그분은 몸과 영으로 우리와 연합하셨고, 우리를 위해 고통을 겪으셨으며, 사도들과 제자들, 선지자들, 아버지들, 족장들에게 같은 법을 물려주셨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거룩한 영으로 미리 가르치셨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순수한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이러한 수용을 선언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15:13). 그러므로 성 바오로는 주님을 따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해 받는 고통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부족한 것을 내 육신으로 채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해 합니다 (골로새서 1:24). 이는 신비롭게도 사랑에서 비롯된 수용을 나타냅니다.
62. 사도들이 어떻게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우리와 교제하며, 우리를 위해 시련을 감수했는지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싶습니까? 그들은 생각을 통해 우리에게 성경을 제시하고, 예언을 인용하고,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으라고 권고하고, 우리가 본성상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을 섬길 의무가 있다고 확신시키고, 우리에게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생각으로 우리를 충실하게 만들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말로 우리에게 간청하고, 위협하고, 가르치고, 폭로하고,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는 것을 질책하고, 우리의 무지함을 부인하고, 성경을 설명하고, 시대를 해석하고,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육신을 입은 말씀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전파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분을 분리할 수 없고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된 두 본성으로 생각하더라도, 모든 시간, 장소, 일에서 거짓을 끊고, 거짓말에 동의하지 않고, 육신으로 자랑하는 자들과 대화하지 않고, 허영심 있는 자들과 함께 머물지 않고, 교만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활한 자들을 이기고, 겸손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경건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박해를 받고, 조롱을 받고, 박탈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고,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우리와 교제에 들어갔으므로 우리의 시련도 받아들였습니다.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너희의 구원을 위한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한 것입니다 (고후 1:6).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요 15:13).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요일 2:16).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로의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 (갈 6:2)
.63. 그러므로 서로의 교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즉, 고난을 통하여 받는 수용과 사랑에서 받는 수용입니다.그것들에 따라 우리는 어떻게, 언제, 누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는 유혹에 대해 호기심을 갖지 말자. 우리 각자에게 편리한 것, 우리가 돌이킬 수 없이 붙잡힐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온 창조물이 협력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를 믿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랑이나 악을 위해 마지못해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견뎌내야 하며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죄에 죄를 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64. 육신의 의지는 육체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며, 그에 따르는 열정이 뒤따르며, 수면과 육체의 평온함으로 강화됩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에 대해 말합니다. 마치 이상한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시험을 위해 일어나는 불에 놀라지 마십시오. (베드로전서 4:12) 그리고 복되신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명령합니다. 성령으로 행하라. 그러면 육신의 정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7). 사도들은 우리가 그런 움직임에 동의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5. 어떤 업적을 시작한 사람은 그것을 완수해야 합니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고 노동이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와 노인은 매일의 금식을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빵을 적당히 먹고, 가끔 물을 마셔서 먹고 난 후에도 여전히 어느 정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고, 음식의 즐거움이 하느님께 드리는 봉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지시된 음식을 먹고 만족하면 곧 다른 음식을 원하게 되고, 만족하지 못하면 항상 배고프고 빵만 있어도 만족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66. 부끄러움 없는 위장을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위장은 위장에 통제당하는 사람들에게 신이기 때문입니다. 위장에 복종하는 사람이 죄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배부름뿐만 아니라 굶주림입니다.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맛보지 않으면 낙담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우리를 공격할 것이고, 우리의 밤샘은 잠으로 바뀌고 낮의 기도는 육적인 생각으로 바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잠에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고 육적인 생각에서 더 큰 해를 입을 것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금식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약한 사람들을 모욕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죄보다 더 나쁩니다.
67. 지혜롭지 못한 농부가 많은 비용을 들여 밭을 경작하지만 씨를 뿌리지 않으면 그는 자신을 해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몸을 큰 노력으로 준비하고 기도의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을 해칠 것입니다. 가난한 농부가 경작되지 않은 밭에 씨를 뿌리면 밀 대신 가시를 거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금식으로 지친 몸에 기도의 말씀을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의의 열매가 아니라 죄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몸도 같은 흙이기 때문입니다. 흙과 같은 부지런함으로 경작하지 않는다면 결코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68. 금식은 지혜롭게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이롭지만, 지혜롭지 못하게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해롭습니다. 그러므로 금식의 이로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금식에서 올 수 있는 해, 곧 허영심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금식을 마치고 먹는 빵은 음식을 충분히 맛보지 않는 날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매일 조금씩 먹어서 몸의 지혜를 제압하고 유익한 기도로 마음을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만함으로부터 보호받고, 평생 겸손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69. 만약 우리가 마음의 겸손에 대해 염려한다면, 우리는 벌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악과 모든 슬픔은 우리의 오만함 때문에 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탄의 천사가 사도 바울을 괴롭히고 그가 높아지지 못하게 했다면, 사탄 자신이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가 스스로를 낮추기까지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가정을 다스리고, 부를 가지고, 아내와 자녀들을 돌보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거짓 없는 마음의 겸손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과 대화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부를 멸시하고, 집을 떠났지만, 악마들은 우리의 오만함을 비웃습니다. 오만한 사람은 자신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았다면, 그는 교만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 지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낯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분의 위대함을 묵상하고, 자신을 책망하며, 복된 욥처럼 말한다: 나는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었지만, 이제는 내 눈으로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사라집니다. 나는 먼지와 재와 같습니다 (욥기 42:5-6).
따라서 욥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를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책망하고 마음의 겸손을 유지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앞에 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고 안식하신 그분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어리석음은 그분의 지혜로 지혜롭게 될 것이고, 우리의 약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강화될 것입니다.
70. 선행은 금식, 밤샘, 해외 생활이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외적인 선행의 질서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질서는 내면에 더 관심이 있고, 이러한 육체적 미덕에 의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은혜에 참여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 숨겨진 악이 음모를 꾸밉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고 행동하지 않으므로, 그는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었다고 생각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여 고상한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다음, 사람이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부주의해진 후에 악은 강도처럼 그를 공격하고, 비밀리에 그를 위해 함정을 준비하고, 그를 유혹하여 땅 깊은 곳으로 던집니다. 20세의 강도나 군인이 함정을 준비하고 적을 매복하고, 뒤쫓고, 뒤에서 공격하고, 포위하고, 마침내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을 때, 수천 년 된 악은 영혼을 처형하는 것으로 구성된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방법을 얼마나 더 잘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마음 속에 비밀스러운 매복을 만들고 영혼을 완전함에 대한 고상한 생각으로 이끌기 위해 일정 시간 동안 행동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초는 사람이 영적으로 가난하고 겸손한 데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의로운 행위를 했어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은혜에 참여하게 되더라도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상상해서도 안 되며, 가르치기 시작해서도 안 됩니다. 큰 금식과 이방 땅에서의 삶과 기도로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은혜를 얻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영혼을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에게는 그러한 은혜의 첫 부분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는 수고와 굶주림과 목마름을 견뎌내어 자신의 노력에 지나치지 않고 자신을 의롭고 은혜에 부유하다고 여기지 않고 마치 외아들을 키웠지만 이미 성장했을 때 죽은 어머니와 같이 울고 애통해할 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71. 외적인 삶과 행동에서 법을 실행하는 사람은 나쁜 본성의 특정 결과에서 자유로울 뿐이며, 열정의 불합리한 행동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으로 인해 구원을 위한 이러한 활동 방식에 만족합니다
.72. 복음적 삶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자신의 악의의 시작과 끝을 모두 제거하고, 모든 미덕을 행동과 말로 행하며 찬양과 고백의 제사를 바칩니다.즉,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니다.정열의 행동에서 생기는 모든 불안에서 벗어나고, 그것과의 싸움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진 그는 영혼을 양육하는 미래의 선에 대한 희망에만 지나치게 기뻐합니다.73
.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미덕 있는 삶의 위업에 있는 초보자들이 악을 피하게 하는 반면, 미래의 선에 대한 보상에 대한 갈망은 진보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데 진지한 주의를 기울입니다.사랑의 신비는 마음을 모든 창조물 위로 높여 하느님을 따르는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게 합니다.주님은 하느님을 따르는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었던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실 뿐이며(시편 145:8), 그들에게 하느님의 것들을 보여 주십니다.
74. 하늘나라는 마치 여자가 가루 세 말 속에 넣어서 다 부풀게 한 누룩과 같습니다(마태복음 13:33). 이것은 사도에 따르면 지성이 받은 주님의 말씀을 몸, 영, 혼의 삼중 주체에 감추고, 생각 속에 흩어진 모든 가느다란 가루를 믿음이라는 한 그릇에 모아서, 그 안에서 역사하는 말씀과 모든 면에서 닮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졌을 때는 작은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셨지만, 적절한 행동으로 자라서 성경에 따르면 높은 곳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에 비유하셨기 때문에, 그것에 접근하는 지성들에게 피난처가 됩니다.
75. 경건의 위업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이행하는 데 있으며, 그 가운데 첫째이자 가장 큰 것은 사랑인데,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사랑은 악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뎌냅니다(고전 13:5-7).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서로 구별되지만, 아무도 그 충만함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단점을 보완하기를 기다리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지 맙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그리고 우리가 태만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랑의 일을 하지 못하는지 아십니다. 사랑은 자발적인 위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난을 통해서도 강해지므로, 하느님께로부터 큰 인내와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지혜롭게 되십시오 (고전 2:18).
76. 칼데아 땅(행 7:4)은 죄의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정욕의 삶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가지 상반된 본성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약속의 땅(히 11:9)은 모든 선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처럼 옛 습관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정욕의 노예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박탈당합니다.
77. 육체의 정욕을 용감하게 이겨내고 더러운 영들과 교묘하게 싸워 그들의 생각을 영혼의 영역에서 몰아낸 사람은 자신에게 깨끗한 마음이 주어지고 올바른 영이 그 안에서 새롭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시 50:12). 즉, 악한 생각에서 완전히 구원받고 은혜의 선물로 신성한 생각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도덕적, 자연적, 신학적 통찰력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밝고 위대한 정신 세계가 될 것입니다.
78. 순수한 마음 (시편 50:12)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눈멀고 형태 없는 기억을 두고, 그분의 형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이며, 그 형상을 통해 자연스러운 것이 보이게 됩니다.
79. 신성한 갈망으로 육체에 대한 영혼의 애정을 극복한 사람은 여전히 육체 안에 있지만 형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갈망하는 자의 갈망을 끌어들이는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이 모든 것 위에 계시며, 그가 하나님을 따르는 어떤 것에 집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의 미덕으로 하나님을 원하고, 우리의 자유 의지가 육체적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우리의 성향에서 진정으로 모든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 위에 우리 자신을 두도록 합시다. 그러면 자연스러운 삶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형언할 수 없게 되기로 결정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80. 백성 밖에 천막을 치고, 즉 눈에 보이는 것 밖에 생각과 마음을 확립한 위대한 모세는 신을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출 34:8). 그는 신성한 신비에 입문하여 원시(출 20:21)에 들어갔고, 보이지 않고 비물질적인 지식의 장소로 들어갔습니다.
81. 우리가 이성을 통해 우리의 본질과 신을 따르는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한 평범한 애착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우리의 미덕은 불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통해 이 존엄성에 도달했을 때에만 우리는 신의 약속의 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합당한 자는 마음이 사랑을 통해 힘을 확립한 곳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성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생각을 초월한 침묵 속에 자리 잡지 않고서는 마음은 모든 것에 내재된 변화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82.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요한복음 20:19) 곧 교활한 영들을 두려워하여 갈릴리의 다락방에서 닫힌 문 뒤에 앉아 있는 자들은 계시의 편에서, 신성한 통찰력의 높이에서 안전하게 살며, 감각을 문처럼 닫고, 감각의 행동 없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평화를 전달하여 냉정함을 주고, 영감을 통해 성령의 은사를 줍니다. 그는 그들에게 사악한 영들에 대한 권능을 주시고, 그의 신비의 표징들을 보여 주십니다.
83. 복음에서 여섯째 날을 보내는 자는 먼저 죄의 초기 움직임을 죽이고, 모든 악에서 순수한 냉정함의 상태에 도달했으며, 가장 미묘한 열정의 생각에서도 마음과 함께 안식했습니다. 요르단을 건넌 후(창세기 32:22) 그는 지식의 편으로 넘어가는데, 그곳에서 평화로 신비롭게 세워진 마음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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