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여덟 번째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예수께서 옹호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는데, 그때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려왔고, 거룩한 교회는 그날을 교회의 생일로 기념하는데, 사도행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오순절이 되어서야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하고 급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려와,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불길과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났고, 그들은 나뉘어져서 각 사람 위에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말하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1-4).
성령께서 오실 때 사도들에게 부어주신 은혜는 얼마나 위대하고 기적적이었는가. 그는 그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여, 그때까지 그들에게 매우 불분명했던 것을 완전히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거룩한 복음을 전파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실수와 불완전함을 제쳐두고, 그로써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똑같은 은혜를 베푸시는데, 성령께서는 그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에 무엇이 필요한지 깨달아 알게 하시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시어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구원의 원수들을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그분은 거룩한 성사를 통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또한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시느니라" (고전 3:16).
우리는 이 위대한 은혜에 대해 성령께 감사해야 하며, 이 은혜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양심적으로 이행하겠다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거룩함과 행복으로 인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여덟 번째 계명에 관해 말할 때,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여덟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는가?
하나님의 여덟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금합니까?
하나님의 여덟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는가?
하나님의 여덟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항상 진실을 말하다
항상 명예와 명예를 소중히 여기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언어를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진실을 말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진실을 말한다는 뜻이고, 모든 거짓말을 막는 사람은 진실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여덟 번째 계명에서 모든 거짓말을 금하실 때, 우리에게 항상 진실을 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계명을 이행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영원한 진리이시며, 그분의 말씀은 그 자체로 진리이고,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으로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과 가장 엄격한 의무가 하나님과 최대한 비슷해지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진리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분과 같아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혜, 선함, 거룩함 면에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노력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자질 면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적인 약함과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종종 죄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다릅니다. 우리에게 항상 진실을 말하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 뜻을 이룰 수 있고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삶 속에서 항상 진실을 말하도록 하는 큰 격려가 됩니다.
이 결심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즉 항상 진실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실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거짓말을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확인됩니다. "거짓말하는 입술은 여호와께 가증하나 진실을 말하는 자는 그의 기쁨이니라" (잠언 12:22).
그리고 시락의 말씀은 또한 하느님께서 거짓말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보여줍니다. "거짓말은 사람에게 혐오스러운 얼룩이며, 무지한 자의 입에는 언제나 거짓말이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보다 도둑이 낫고, 둘 다 멸망을 상속받을 것이다. 거짓말은 부끄러운 습관이며, 거짓말쟁이의 부끄러움은 영원히 그에게 남습니다 ."(시편 20:24-26)
그리고, 하나님이 진실 그 자체이신데도 거짓말에 반대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탄은 그 존재 전체로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쟁이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반하는 죄를 짓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가 그를 사탄과 연결시켜 그와 함께 일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 암브로시오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경고합니다. "거짓말을 조심하십시오. 거짓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악마의 자식이며 진리의 하느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는 그분이 거짓말에 대해 벌을 내리시는 방식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엄하게 처벌하시고, 심지어 사형까지 선고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여기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온갖 은혜를 베푸십니다.나다나엘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이 제자를 보시자마자 즉시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시며 "보십시오. 참 이스라엘 사람이시며 거짓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은 정직하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런 사람들만이 언젠가는 천국의 영원한 행복과 기쁨에 들어갈 수 있다는 달콤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위대한 행복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주님, 누가 당신의 천막에 머물 수 있으며, 누가 당신의 거룩한 산에 거할 수 있습니까?" "정직하게 행하는 자, 옳은 일을 행하는 자,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을 말하는 자, 혀로 중상하지 아니하는 자" (시편 15:1-3)
진실함은 하나님과 사람을 모두 기쁘게 합니다. 정직하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지역 사회에서 명성을 얻고,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으며, 어떤 상황에서든 환영을 받습니다. 오히려 거짓말쟁이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받으며 피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진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인정해 왔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동료 인간으로부터 존경, 신뢰, 사랑을 얻고 싶다면, 정직해야 하고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자석이 철분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진실함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진실함은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용서를 얻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사람들이 그들을 다르게 보고 더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과 더불어 진실을 말하십시오" (에베소서 4:25).
물론 의무와 신중함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며, 만약 갑자기 거짓말을 했다면 즉시 바로잡고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고백해야 하며,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처벌로 적절한 속죄를 우리 자신에게 부과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다시 그런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우리에게 가해질 수 있는 처벌과 마땅한 처벌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명예와 좋은 이름을 소중히 여기다
우리의 이러한 관심은 이웃의 명예와 우리 자신의 명예 모두에까지 확대됩니다!
우리는 이웃의 명예와 좋은 이름을 다른 세상적 소유물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명예는 돈이나 다른 모든 물질적 재화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부당하게 해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결코 타당한 이유 없이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엄격한 의무입니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명예를 부당하게 훼손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험담, 중상모략, 비난, 조롱을 경계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우리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다소나마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덟 번째 계명은 우리가 큰 어려움 없이 이웃을 위해 일어서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부당하게 해를 끼치거나 좋은 평판을 앗아갈 때 말입니다.
이웃이 소유한 다른 세상적 재화에도 동일한 것이 적용됩니다. 만약 우리가 도난, 사기 또는 다른 부당한 수단을 통해 누군가의 재산에 피해를 입혔을 때, 우리는 거룩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가능하다면 그 피해를 제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에게 이웃의 좋은 평판을 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라고 명령합니다.
거룩한 교회의 역사에서, 경건한 신자들은 언제나 이 의무를 다해왔으며, 험담을 엄격히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이웃의 명예를 보호해왔습니다. 그들의 모범을 따라 오늘날 우리도 이웃의 명예와 명예를 보호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소문이 퍼지는 사회에 있다면, 그리고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 우리와 동등하거나 우리보다 아랫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꾸짖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그의 말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남긴 나쁘고 부정적인 인상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영적, 세속적 지도자들에 대한 험담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위해 일어서서 옹호해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부당하게 그리고 정당한 이유 없이 좋은 평판을 잃는다면, 그들은 신민들의 이익을 위해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비밀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웃에게 불쾌하거나 불의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자연법에 의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말로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으며, 그 말로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비밀을 우리 자신에게만 지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은 비밀이지만 우연히 알게 된 비밀은 이웃의 명예를 훼손할 경우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비밀이 공개되는 경우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는 비밀을 맡은 사람이 그것이 완전히 공개되도록 허용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그의 의지에 반하여 행해진 것이 아니므로 그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방법으로 알려졌을 때에도 비밀을 공개하는 것은 허용됩니다. 여러 사람이 비밀을 알고 있을 때, 그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며, 우리는 그 비밀에 대해 침묵할 의무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나 국가, 개인에게 큰 해를 끼칠지라도 비밀을 공개하는 것은 허용됩니다. 물론, 그럴 경우에는 비밀을 밝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능하다면 누구나 이웃을 해로부터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편지 속의 비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의 법칙과 대중의 법, 그리고 법률에 따르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편지를 열어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편지를 열어서 읽는 것이 허용된다면, 인간 사회에는 큰 혼란이 일어나고 모든 서면 의사소통은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편지를 여는 것은 사적 또는 공적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경우에만 허용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모와 지도자는 자녀나 단체의 편지에 금지된 내용이나 좋은 도덕이나 윤리에 반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있을 경우 해당 편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여덟 번째 계명은 하나님의 명예, 이웃의 이익, 우리 계층의 의무를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의 명예와 좋은 평판을 돌보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에게 돈과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보호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명예와 좋은 평판을 보호할 더 큰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명예와 좋은 평판은 다른 모든 지상의 물품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시락은 "당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것은 수천 개의 큰 황금 서약보다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행복한 삶은 며칠뿐이지만, 명예로운 이름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시편 41:12-13)
우리에게 돈과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보호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명예와 좋은 평판을 보호할 더 큰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명예와 좋은 평판은 다른 모든 지상의 물품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시락은 "당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것은 수천 개의 큰 황금 서약보다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행복한 삶은 며칠뿐이지만, 명예로운 이름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시편 41:12-13)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 요구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좋은 평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종종 개인의 명예, 즉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좋은 평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사제를 살펴보자. 신하들 사이에서 명예를 잃었다면, 그는 신을 기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의 또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제로서의 의무를 양심적으로 수행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를 반대하고 멸시하기 때문에 거의 성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잃은 부모와 지도자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명예가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말한 바를 통해,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명예도 돌보게 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우리의 명예를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며, 우리의 눈앞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명예를 하나님의 영광을 퍼뜨리는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하십니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우리가 명예를 중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이웃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고 그를 경건함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와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 (롬 14:19).
우리는 이웃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분명히 경고하고 위협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를 짓게 하면 차라리 나귀가 굴리는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 깊은 데 빠지는 편이 그에게 나을 것이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마태복음 18:6)
위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명예가 없는 사람은 스캔들에 연루될 위험에 완전히 노출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명예가 없는 사람은 비록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악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이웃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쁜 예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왜냐하면 사람은 다른 사람들, 특히 지도자들에게서 보는 악행이나 듣는 악행을 실제 악행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고, 조금씩 자신도 같은 악행을 저지르게 되면서,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지르면 그렇게 악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잃거나 나쁜 평판을 받으면 이웃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은 확실하고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와 반대로 명예와 좋은 평판은 이웃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교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이웃에게서 정직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이웃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이웃의 덕을 좋아하고 그것을 본받고 싶어합니다. 바로 덕행을 쌓은 삶이 이웃을 크게 사로잡고 이웃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힘쓰라”고 말하고 가르칩니다 (롬 12:17).
더욱이, 수업 의무 역시 우리에게 명예를 지키도록 요구합니다!
명예는 신뢰를 얻고, 신뢰는 번영의 기초가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람은 어떤 사회적 계층에 속해 있든 세상에서 좋은 평판을 누리고 있다면 번영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상인이라면 그의 가게는 가득 찰 것이고, 만약 그가 장인이라면 일이 많을 것이고, 만약 그가 노동자라면 일이 부족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명예를 잃은 사람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유능하더라도 그는 결코 발전할 수 없습니다. 명예를 잃고 다른 사람을 이끌고 영원한 구원을 돌보아야 하는 계층에 속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도 평판이 나쁜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거나, 훈계를 받거나, 책망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교훈은 멸시받고 그의 좋은 가르침은 배척당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아름다운 교훈을 주고, 기도하고, 훈계하고, 벌을 주더라도, 자녀의 행동이 부모 앞에서 명예를 잃게 한다면 이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원칙은 영적 계층이든 세속적 계층이든 모든 지도자들에게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좋은 평판을 잃었다면 그들의 손은 거의 묶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경고, 처벌, 그리고 좋은 본보기는 척박한 땅에 떨어진 씨앗과 같습니다. 이것이 부모와 지도자가 자녀의 좋은 평판과 명예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에 대한 의견이 좋을수록, 그들은 신하들에게 더 많은 이로움이 되고, 그들의 조언이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그들이 남기는 인상이 좋아지고, 그들의 좋은 본보기가 더 효과적이 되며, 그들이 현재와 학급의 의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아무도 네가 젊다는 이유로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더욱이,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십시오! 자신과 과학을 잘 돌보세요! "이 의무를 계속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딤전 4:12-16)
이 원칙은 영적 계층이든 세속적 계층이든 모든 지도자들에게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좋은 평판을 잃었다면 그들의 손은 거의 묶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경고, 처벌, 그리고 좋은 본보기는 척박한 땅에 떨어진 씨앗과 같습니다. 이것이 부모와 지도자가 자녀의 좋은 평판과 명예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에 대한 의견이 좋을수록, 그들은 신하들에게 더 많은 이로움이 되고, 그들의 조언이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그들이 남기는 인상이 좋아지고, 그들의 좋은 본보기가 더 효과적이 되며, 그들이 현재와 학급의 의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아무도 네가 젊다는 이유로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더욱이,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십시오! 자신과 과학을 잘 돌보세요! "이 의무를 계속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딤전 4:12-16)
모든 사람은 진정한 명예는 오로지 미덕에 기초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 베르나르는 미덕이 영광의 어머니이며, 미덕만이 영예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삶의 모든 상황에서 올바르고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모든 정직한 사람의 은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모든 악의 그림자를 피하면서 정직하고 덕행 있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만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명예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명예가 그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높이기 위해 정직하게 살아야 하지만, 그 명예가 그의 정직한 삶의 주된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탐욕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야망이 바리새인들의 큰 죄였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선을 행한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존경하고, 명예롭게 여기고, 감사하게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명예는 하느님의 명예를 위해 필요한 정도, 이웃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이는 정도, 자신의 지위에 따른 의무를 다하는 정도까지만 지켜야 하며, 야망이나 다른 죄악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만약 그의 명예가 침해당하면, 특히 신의 명예와 이웃의 이익이 요구할 때, 그는 그것을 방어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명예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모범을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귀신에게 사로잡힌 것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를 공경하노라 너희가 나를 멸시하느니라" (요한복음 8:49).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이 주님이 베엘제붑의 도움으로 악령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을 때, 주님은 자신을 변호하셨고, "내가 베엘제붑의 도움으로 악령을 쫓아낸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의 도움으로 악령을 쫓아내느냐?"라는 말씀으로 그 사실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를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2:27-28)
주님께서 보이신 이러한 모범은 우리의 변호가 차분해야 하며 결코 온건함의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결백을 말해 주는 모든 이유를 늘어놓고, 우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신과 인간의 법이 준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지만, 이는 열정이나 비통함, 증오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주님의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세요! 당신을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을!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27-28)
우리의 명예가 훼손되어 하나님의 명예나 이웃의 이익이 훼손되지 않는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조롱과 중상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왜냐하면 인내심을 가지고 이를 참아내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가장 빛나는 정당화보다 더 널리 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명예를 지킬 방법이 없더라도 고통을 겪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고,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만간 우리의 결백함이 드러나고 우리는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이 약속에 따라 하늘에서 확실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보상으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니라!” (마태복음 5:11-12)
우리는 항상 우리의 언어를 조심해야 합니다.
여덟 번째 계명에 반하는 죄는 거의 모두 혀로 저질러진다! 아니, 오히려 혀로 저질러진다!
법정 내외에서의 거짓 증언, 거짓말, 험담, 중상모략, 비난, 거짓 판단은 혀로 하는 죄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고 많은 사람이 저주를 받는 이러한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의 혀를 주의 깊게 지켜야 합니다.
자신의 혀를 조심하지 않는 사람은 종종 여덟 번째 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고, 셀 수 없이 많은 죄로 양심에 짐을 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덟 번째 계명에서 우리에게 혀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계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자신의 혀를 조심하지 않는 사람은 종종 여덟 번째 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고, 셀 수 없이 많은 죄로 양심에 짐을 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덟 번째 계명에서 우리에게 혀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계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생각 없는 것과 성급하게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경계하는 것이다. 생각 없는 것은 많은 죄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말에 조심하지 않는다면, 고백할 때 우리가 지은 많은 혀의 죄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해치는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서에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 생명을 지키나, 함부로 말하는 자는 자기 머리에 파멸을 가져온다" (잠언 13:3)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현명한 말은 우리에게 언제나 언어에 주의하라고 가르칩니다. 즉, 말하기 전에 항상 우리가 하는 말이 좋고 정당한지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말할 때 돈을 주고받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들이 처음에 돈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조사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말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말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극히 조심해야만 우리가 한 말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자주 묵상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을 것이요 네 말로 정죄함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2:36-37)
성 제롬에 따르면, 쓸모없는 말이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는 말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쓸모없는 단어란 합리적인 선을 지칭하지 않는 단어라고 강조했습니다.
말로 어떤 유익한 것도 이루려는 의도가 없는 사람은 쓸모없는 말을 한다. 악이 담겨 있지 않고 진실, 사랑, 정의를 훼손하지 않는 말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서 대답해야 한다면, 악이 담긴 말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큰 책임이 있겠는가? 거짓말, 험담, 중상모략, 선동, 저주의 죄를 지은 사람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가?
불필요한 말에 대해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과 침묵의 가치를 이해한 거룩하고 축복받은 거룩한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들은 죄스러운 말을 주의 깊게 피하고 일상생활에서 가능한 한 적게 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불필요한 말에 대해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과 침묵의 가치를 이해한 거룩하고 축복받은 거룩한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들은 죄스러운 말을 주의 깊게 피하고 일상생활에서 가능한 한 적게 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험담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언젠가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즉시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말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에 있다면,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 대해 답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적게 말해야 하고, 꼭 필요하고 좋은 말만 해야 합니다. 자신의 혀를 제어하고 말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큰 재주와 지혜를 보여준다.
세 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야망, 증오, 복수심, 기타 사악한 열정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샘이 막히면 개울이 마르고, 뿌리가 잘리면 나무가 마르고, 기초가 무너지면 건물이 무너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모든 무질서한 정욕이 깨끗해지면 악한 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혀의 모든 죄는 정욕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야망과 탐욕이 많은 거짓말의 원인이 되고, 증오와 보복심이 험담과 중상모략의 원인이 되고, 자기애와 질투가 끔찍한 악을 부추기는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러한 열정이 여전히 마음속에 있는 동안에는 악한 말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확증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야,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느니라" (마태복음 12:34)
사실, 이러한 열정이 여전히 마음속에 있는 동안에는 악한 말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확증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야,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느니라" (마태복음 12:34)
마음의 어지러운 정욕을 극복한 사람은 혀를 다스려 결코 악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달콤한 샘에서 달콤한 물만이 나오듯이, 좋은 마음에서는 좋은 말만이 나오기 때문이다. 거룩한 교회의 역사 속의 모든 경건하고 덕이 높은 신자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마음에 어떠한 악한 경향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혀로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그는 말하는 모든 것이 진실이 되도록 노력하며, 모든 험담을 싫어하고, 그의 입에서 나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혀를 악한 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마음속의 모든 무질서한 정욕을 억누르고 파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흥분이 극에 달했을 때는 결코 말을 하지 않고, 흥분이 가라앉고 진정될 때까지 침묵을 지키기로 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그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그는 나중에 자주 몹시 후회할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규칙을 잘 기억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생각 없이 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말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내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옳고 좋은지 고려해야 하며, 우리에게 쓸모없는 말을 하면 반드시 엄중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죄악적인 열정, 특히 야망, 질투, 증오, 그리고 모든 복수심에 대한 욕망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혀를 제어하기 위해 우리는 항상 시편의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나는 내 혀로 죄를 짓지 아니하도록 내 길을 지키리라. "내가 내 입을 굴레로 막으리라" (시편 39:2)
오직 행복한 사람만이 자신이 결코 거짓말을 한 적이 없고, 누구에 대해서도 험담을 한 적이 없으며, 모든 쓸데없는 수다를 피해왔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다가 축복 속에 죽을 것이며, 사도 베드로의 말씀이 그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고자 하는 자는 혀를 악에서 금하고 입술을 거짓된 말에서 금하라" (베드로전서 3:10).
하나님의 여덟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금합니까?
첫째, 여덟 번째 계명은 진실이 아닌 말을 하지 말 것을 금하고, 특히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말 것을 금합니다. 법정에서 유리하든 불리하든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한 것뿐만 아니라 정의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제시하고 사실인 것을 완전히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판사가 유죄자를 무죄 선고하고 무고한 사람을 유죄 판결을 내리도록 이끈다.
거짓 증인이 된 사람은 가능하다면 이웃에게 가한 불의를 속죄하기 전까지는 죄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선서하에 거짓 증언을 확증하면, 그는 위증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미워하시는 죄 가운데 거짓 증언을 포함시키고, 거짓 증인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법정에 소환된 증인으로서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롭든 유익하든 관계없이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법정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 대해 언젠가는 엄격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고, 우리가 거짓 증인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우리의 영혼과 행복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덟 번째 계명에는 다음과 같은 죄가 포함됩니다: 거짓말, 위선, 험담, 중상모략, 선동, 비난, 거짓 또는 거짓 의심, 거짓 또는 거짓 판단,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웃의 명예와 명예를 해치는 모든 죄입니다.
거짓말에 대하여
거짓말에 대해 말할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짓말은 우리가 고의로 거짓말을 할 때 발생합니다. 즉, 거짓말은 의식적으로 하는 거짓이나 기만입니다.
거짓말은 개인, 인류 전체, 그리고 거짓말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해를 끼치는 해로운 죄입니다.
거짓말은 우리가 고의로 거짓말을 할 때 발생합니다. 즉, 거짓말은 의식적으로 하는 거짓이나 기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이 거짓이거나 거짓말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때, 고의로 거짓을 말합니다. 우리가 틀린 말을 하고, 비록 우리가 거짓된 말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의식적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지식으로 그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려는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의로 거짓을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의도적으로 속여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게 만들 때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거짓말은 농담으로, 필요에 의해, 호의로, 악의로 할 수 있다.
거짓말은 농담으로, 필요에 의해, 호의로, 악의로 할 수 있다.
우리가 시간을 보내거나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때, 그것은 농담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 거짓말을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호의를 얻지 못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말로 이웃에게 영혼이나 세상적인 이익을 해칠 때, 우리는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죄악에 관한 한,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말은 피해가 클 경우에는 항상 중대한 죄입니다. 농담이나 호의, 필요에 의한 거짓말은 본질적으로 사소한 죄일 뿐이지만 피해와 상황에 따라서는 심각한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이 중대한 죄이든 사소한 죄이든, 우리는 항상 거짓말을 피하고 미워해야 합니다. 거짓말 자체가 매우 부끄러운 일이고 결과적으로 매우 해롭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가능한 한 그들의 하나님이자 창조주와 비슷해지라는 명령을 받고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여라" (마태복음 5:48)라는 말씀으로 이를 확증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진리이시며, 거짓말을 모르시고 모든 거짓말의 적입니다.발람은 그의 노래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아담의 아들이 아니시므로 회개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확증합니다. "그가 말씀하시고 행하지 아니하셨는가? 그가 약속하시고 이행하지 아니하셨는가?" (민수기 23:19).
우리는 가능한 한 신과 비슷해지려고 노력할 의무가 있으므로, 그의 가장 좋은 특성이나 특징, 즉 그의 진실성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는 주님의 훈계에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진리를 사랑하고 결코 버리지 말라는 의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버리면 하나님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므로, 그분은 당신의 형상과 모습인 인간이 거짓말로 더럽혀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 는 주님의 훈계에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진리를 사랑하고 결코 버리지 말라는 의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버리면 하나님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므로, 그분은 당신의 형상과 모습인 인간이 거짓말로 더럽혀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아시다시피, 신은 살인을 금하셨지만 살인이 허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합법적인 정부는 범죄자를 사형으로 처벌할 권리가 있으며, 정당한 자기 방어를 위해 살인도 허용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일요일과 공휴일에 열심히 일하는 것을 금하셨지만, 아픈 사람을 위해 사랑의 행동을 보이거나, 자신이나 이웃에게 해를 끼친 것을 치우도록 강요당하는 경우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들과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을 명령하셨지만, 부모나 윗사람이 죄악적인 것을 명령하면 순종의 의무는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일요일과 공휴일에 열심히 일하는 것을 금하셨지만, 아픈 사람을 위해 사랑의 행동을 보이거나, 자신이나 이웃에게 해를 끼친 것을 치우도록 강요당하는 경우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들과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을 명령하셨지만, 부모나 윗사람이 죄악적인 것을 명령하면 순종의 의무는 사라집니다.
특정 조건 하에서는 구속력을 상실하는 다른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허용하실 수 없습니다. 거짓말은 언제나 악하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사람은 악마와 같이 됩니다. 악마는 거짓의 영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아담과 이브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으라고 설득하고, 그들이 죽지 않고 신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짓말로 이미 그들을 파멸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거짓 게임을 세기마다 계속하고 있으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악마는 아담과 이브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으라고 설득하고, 그들이 죽지 않고 신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짓말로 이미 그들을 파멸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거짓 게임을 세기마다 계속하고 있으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마귀와 동등하게 되는 것이며, 주님의 참된 말씀이 그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한복음 8:44).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 대신에 악마를 자신의 롤모델로 선택하고 그와 같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거짓말은 그 자체로 부끄러운 일이며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신약과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거짓말이 가증스러운 죄로 묘사된 곳을 많이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거짓말하는 입술은 여호와께 가증함이요, 진실을 말하는 자는 그의 기쁨이니라" (잠언 12:22)라는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거짓말은 사람에게 역겨운 오점이며, 그것은 언제나 무지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다." 거짓말하는 사람보다 도둑이 낫고, 둘 다 멸망을 상속받을 것이다. 거짓말은 부끄러운 습관이며, 거짓말쟁이의 부끄러움은 영원히 그에게 남습니다 .”(시락 20,24-26)
주님은 거짓말쟁이를 마귀의 자식이라고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항상 진실을 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너희 말은 '예' '예' - '아니오' '아니오'로 하라!" "이보다 더한 것은 다 악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니라" (마태복음 5:37)
사도 바울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과 더불어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엡 4:25)
거룩한 교회의 시작에서, 진실은 이 세상의 삶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가치가 있었으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종 다양한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엄격한 회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거짓말은 해로운 죄입니다. 거짓말은 개인은 물론, 인류 전체와 거짓말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해를 끼칩니다.
거짓말은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친다. 거짓말을 들으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방식이 달라져 결과적으로 더 크거나 작은 해를 입게 된다. 이런 거짓말은 많고, 언뜻 보기에 사소해 보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짓말은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도 해를 끼칩니다. 만약 거짓말이 허용된다면, 인간 사회의 모든 유대감은 사라질 것이고, 서로가 함께 사는 것이 불가능해질 만큼 무질서가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을 해칠 뿐만 아니라, 온 가족과 공동체의 이익도 해치고, 다시 말해 인간 사회의 기반을 파괴합니다.
더욱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칩니다!
모든 사람은 정직하고, 솔직하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서나 존경을 받으며,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즐기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반대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가장 멸시받는다. 거짓말쟁이가 때로는 진실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신뢰받고, 피받고, 멸시받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를 멸시하시며, 현세와 영원토록 그를 벌하십니다. 거짓말을 해서 사형을 선고받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예입니다.
거짓말쟁이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과 같은 줄에 서 있으며, 인생이 끝날 때까지 회개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의 운명은 지옥의 끔찍한 불 속에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거짓말이 대죄인 것은 아니지만, 부주의하게 저지른 사소한 죄가 대죄로 이어지는 것처럼 거짓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의 그늘에서 모든 범죄와 죄는 번성하고 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거짓말이라도 매우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모든 것보다 진실해야 할 사람의 입에서 거짓말이 나온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항상 진실을 밝힐 의무는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항상 진실을 밝힐 의무는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은 결코 허용되지 않으며, 진실을 밝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예, 정의, 사랑이 요구할 때에만 명령됩니다. 신앙의 선함, 기독교적 신중함, 개인적, 이웃적 이익 때문에 때때로 진실을 감추는 것이 의무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짓 없이 행해져야 한다는 조건에서만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의 조롱을 받지 않기 위해 어떤 신앙의 진리에 관해서는 엄격히 침묵을 지켰습니다. 또한 그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할까봐 그들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행방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알 권리가 없는 것에 대해 묻는다면, 어떻게 보면 알 권리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 말하는 셈이 됩니다. 중요한 경우에는 여러 의미를 지닌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허용됩니다. 이처럼 연설에서 뭔가를 생략함으로써 청취자는 연설의 의미와 다른 의미를 이해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집트에 있을 때 그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야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단지 허용되는 표현이며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일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사라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침묵으로 지켰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단어나 말투를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을 밝히지 않아야 할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오도하려는 의도로 모호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단어나 말투를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을 밝히지 않아야 할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오도하려는 의도로 모호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경우에는 상대방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도록 말을 배열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주신 것은 우리의 의견을 숨기고 이웃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양심과 지식에 따라 이웃에게 꼭 알아야 할 사실만을 밝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욥의 이 말씀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내 영이 내 속에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내 코에 있는 한, 내 입술은 악을 말하지 아니하겠고 내 혀에 거짓이 없으리라" (욥기 27:3-4).
위선에 대하여
우리가 거짓말을 경계해야 하는 것처럼, 위선이나 허위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실제보다 더 훌륭하고 독실해 보이는 위선과 가식으로 죄를 짓습니다.
허위나 위선은 그 원인과 결과 모두 부끄러운 죄입니다. 모든 사람의 양심은 죄가 추악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가장 큰 범죄자조차도 자신의 사악한 행위를 은폐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니라” (요한복음 3:20)고 말씀하셨습니다.
허위나 위선은 그 원인과 결과 모두 부끄러운 죄입니다. 모든 사람의 양심은 죄가 추악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가장 큰 범죄자조차도 자신의 사악한 행위를 은폐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니라” (요한복음 3:20)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행한 악행을 세상에 보이지 않게 숨기려는 사람은 위선자가 아니며, 가장하는 사람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악행을 감추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이웃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 즉 죄인에게만 멸망이 닥치기 때문이다.
위선자는 허영심이나 자기만족, 인간적인 영광을 위해 노력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좋은 의도가 없기 때문에 선행에 대한 모든 초자연적인 공로를 잃게 됩니다.
위선자는 자신의 사악한 생각, 열정, 죄를 신중하게 숨기고, 항상 자신을 좋은 모습으로 보여 사람들이 자신이 실제로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속이는 사람입니다. 위선자는 선한 사람이 되려는 의도가 전혀 없지만,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합니다. 그의 마음은 타락했고 자기중심성이나 허영심, 인간적인 명예, 칭찬, 영광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사기를 저지르면서 이기심을 추구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얗게 칠해진 무덤이나 석고로 칠해진 무덤과 비슷합니다.
주님은 위선적인 사람들을 이렇게 위협하십니다.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 위선자들아, 화가 있구나! 너희는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하얗게 칠한 무덤과 같구나.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거늘 속은 위선과 불의로 가득하도다" (마태복음 23:27-28).
사람들이 무덤을 보지 못하도록 덮고 장식하는 것처럼, 위선자도 자신의 진짜 의견과 모습을 숨깁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은밀하게 모든 정욕에 굴복하지만, 공개적으로는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죄의 그늘을 피합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는 경건해 보이고, 신의 영광에 대한 열의가 가득하며, 죄를 미워하고, 특히 눈에 보이는 선행을 행합니다. 그는 공개 예배에 부지런히 참석하고 자주 성찬을 받으며, 금식 계명을 지키고, 자선을 베풀고, 신앙에 관해 기꺼이 이야기하며,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 여길 정도로 처신합니다.
따라서 위선자란 실제로는 독실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해 독실한 척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위선자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이웃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말로 거짓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행동으로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위선은 그 자체로 죄악이며 거짓말이기 때문에 온갖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거짓말과 마찬가지로 위선은 중대한 죄이거나 사소한 죄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 심각성은 가볍거나 무거운 의도를 달성하고자 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처럼 주님을 배반하기 위해 그분께 입맞춤을 한 유다는 중대한 죄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위선이 주님을 배반하는 큰 범죄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위선이 중대한 죄이든 사소한 죄이든, 위선은 항상 본질적으로 사악합니다. 왜냐하면 위선은 사악한 원인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악한 원인은 주로 허영심이나 자만심, 오만함입니다.
미덕은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고 존경받으므로, 타락한 사람조차도 미덕에 대한 동정심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많은 투쟁과 자기 부정이 필요합니다. 덕이 있다는 명예를 값싼 방법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래서 위선에 빠지고 실제로는 덕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가장 큰 죄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금식하고, 자선을 베풀고, 모든 의식을 정확하게 지키고, 참된 경건함의 모든 징조를 보였지만, 그들이 이를 행하도록 강요받은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의 영광과 찬양을 위해서였습니다.
위선의 두 번째 원인은 탐욕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탐욕 때문에 종종 위선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부지런히 교회에 가서 독실하게 기도함으로써 자신이 독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좋은 신자로 여겨져서 더 큰 지원이나 도움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또한 도둑질, 사기, 고리대금, 부정 등의 여러 가지 악덕이 많은 사람을 위선자로 만든다. 그들은 자신의 악행을 더욱 은폐하기 위해 선한 신자라고 가장하고, 신앙을 위해 일하고, 형제단에 가입하고, 순례를 여행하고, 종종 고백과 성찬식에 참석합니다. 이런 위선은 주님께서 아름답게 하얗게 칠해진 무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인데, 그 안에는 썩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위선은 유혹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또한 도둑질, 사기, 고리대금, 부정 등의 여러 가지 악덕이 많은 사람을 위선자로 만든다. 그들은 자신의 악행을 더욱 은폐하기 위해 선한 신자라고 가장하고, 신앙을 위해 일하고, 형제단에 가입하고, 순례를 여행하고, 종종 고백과 성찬식에 참석합니다. 이런 위선은 주님께서 아름답게 하얗게 칠해진 무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인데, 그 안에는 썩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위선은 유혹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우리는 악마가 신자들을 포함하여 경계하지 않는 사람들을 속일 때 빛의 천사의 모습을 취하는 매우 흔하고도 효과적인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가장 친한 친구인 척하며 에바에게 접근해 그녀를 유혹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사막에서 신성한 구세주를 시험할 때, 성경을 사악한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습니다. 악마의 이런 거짓 행동은 유혹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본보기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진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을 드러내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멸시하고 외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악마적인 사기행각을 더 쉽게 실행하기 위해 성인의 모습을 취합니다.
이단자들은 거의 모두 위선자였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열렬한 종으로 내세웠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총과 계시를 자랑하였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을 속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단자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시며,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나 속은 탐욕스러운 이리라" (마태복음 7:15) 고 경고하십니다 .
그가 가장 친한 친구인 척하며 에바에게 접근해 그녀를 유혹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사막에서 신성한 구세주를 시험할 때, 성경을 사악한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습니다. 악마의 이런 거짓 행동은 유혹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본보기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진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을 드러내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멸시하고 외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악마적인 사기행각을 더 쉽게 실행하기 위해 성인의 모습을 취합니다.
이단자들은 거의 모두 위선자였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열렬한 종으로 내세웠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총과 계시를 자랑하였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을 속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단자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시며,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나 속은 탐욕스러운 이리라" (마태복음 7:15) 고 경고하십니다 .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순수함과 순결을 유혹하려는 사악한 사람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위선보다 더 편리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유혹하고 싶은 사람을 좋은 행동으로 사로잡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을 방문하면, 그들은 오직 경건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성인처럼 그들 앞에서 경건하게 행동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점차 이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위선의 결과를 살펴보면, 그것은 훨씬 더 추악해집니다. 이것은 선행에서 초자연적인 가치를 빼앗고, 그 선행으로 다른 세계에서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게 만듭니다. 몇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손을 뻗고 기도하고, 매일 빵과 물로 금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선물을 주고, 온유, 순종, 순결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이고, 이런 미덕과 선행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가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영원한 보상을 조금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처럼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이 은밀하게 행해지도록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기도할 때에는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십시오.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가 상을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1-5)
위선자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려는 모든 선행이 헛되고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는 수고해서 번 급여를 허비한 근로자와 비슷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의 공로를 잃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도 잃는다.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광만을 구하며, 그의 마음은 자기의의로움이나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고 영광과 인간적인 칭찬을 갈구하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거부하시는 주된 이유이다.사도 베드로가 확증하듯이: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베드로전서 5:5).
위선적인 사람은 속임수와 교활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의 근원을 닫으십니다. 잠언에서 "의로운 자만이 땅을 차지할 것이요, 흠 없는 자는 거기에 남을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악한 자들을 땅에서 끊어 버리시고, 신성모독하는 자들을 땅에서 뽑아 내실 것입니다 ."(잠언 2:21-22)
위선자는 종종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이며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 일합니다. 그는 자비를 바랄 수 없고, 유혹자와 불쾌감을 주는 자에게 주님께서 선언하신 저주를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큰 죄인들에게도 사랑과 자비로 가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 막달레나, 성전의 간음한 여자, 야곱의 우물가의 여자, 세리 삭개오, 병자, 십자가의 도둑이 다 그분에게서 자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선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거듭해서 위협하였고, 끔찍한 말로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큰 죄인들에게도 사랑과 자비로 가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 막달레나, 성전의 간음한 여자, 야곱의 우물가의 여자, 세리 삭개오, 병자, 십자가의 도둑이 다 그분에게서 자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선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거듭해서 위협하였고, 끔찍한 말로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위선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저주를 가져오는 끔찍한 죄이며, 위선자는 거의 항상 회개하지 않거나 회개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거룩한 가톨릭 교리와 신앙은 회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자기인식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개선할 수도 없고, 개선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회개의 상태 자체가 위선자에게는 부족합니다. 그는 완전히 눈이 멀어 자신의 사악함의 심연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개선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죄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거룩한 가톨릭 교리와 신앙은 회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자기인식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개선할 수도 없고, 개선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회개의 상태 자체가 위선자에게는 부족합니다. 그는 완전히 눈이 멀어 자신의 사악함의 심연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개선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죄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더욱이 회개에는 겸손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위선자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이 불쌍한 죄인임을 보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죄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또한 참된 통회나 회개는 고행을 위해 특별히 필요합니다. 죄인은 무엇보다도 모든 악을 미워해야 하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선이신 하나님을 그토록 자주 몹시 불쾌하게 한 것을 후회해야 합니다. 위선자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이 완전히 악하여 회개를 모르기 때문에 죄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선자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이 불쌍한 죄인임을 보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죄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또한 참된 통회나 회개는 고행을 위해 특별히 필요합니다. 죄인은 무엇보다도 모든 악을 미워해야 하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선이신 하나님을 그토록 자주 몹시 불쾌하게 한 것을 후회해야 합니다. 위선자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이 완전히 악하여 회개를 모르기 때문에 죄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리새인들은 오만함과 회개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했지만, 심지어 가장 큰 죄인들 중 일부도 끈기 있는 회개를 통해 개종하고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위선자였던 것은 분명하며, 위선자는 개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위선자들 역시 스스로 멸망의 징조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동료 인간들에게 행하는 악행도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많은 위선자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오도하고 파멸시키는 척만 하며, 종종 성공합니다. 그들의 이웃들은 그들의 파괴적이고 사악한 네트워크에 빠져 그들과 함께 멸망하게 됩니다.
위선자는 사람들이 신앙과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는 곳을 알고 있는 곳에서 희생자를 찾습니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신앙의 친구인 척합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행동함으로써 피해자의 신뢰를 얻고 싶어 하며, 나중에 피해자에게 자신의 원칙과 생각을 강요합니다. 그는 자신을 진실과 덕의 가장 큰 친구라고 가장하면서 자신의 불경건한 원칙과 타락한 교리를 크게 칭찬하고 퍼뜨립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를 통해 위선은 그 자체로 악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도 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에 마땅히 동의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 (누가복음 12:1).
우리는 모든 거짓과 거짓말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위협하신 일이 우리에게도 닥칠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독실하고 덕이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말입니다. 우리 각자는 언젠가 교만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와 사람들 앞에서 모든 인간의 수치심을 드러내시고, 그들을 지옥의 끔찍한 고통에 처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선이 가장 반대하는 사랑의 계명을 지킬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선의 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경건함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위선은 이러한 미덕과 함께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선의 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경건함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위선은 이러한 미덕과 함께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짓 없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참된 의로움을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축복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와 은총으로 바라보시고 언젠가는 우리를 그분의 충실한 종으로 불러 영원한 천국의 기쁨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험담과 중상에 대하여
"아버지께로부터 내가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나를 증거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이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깨우쳐 주셔서 그들이 진실을 알 수 있게 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두려움 없이 그 진실을 선포할 용기를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오기 전에는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두려워했고, 자신들이 배운 진리를 감히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오기 전에는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두려워했고, 자신들이 배운 진리를 감히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부끄러운 거짓말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에야 그들의 무지와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화되어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 앞에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령 혹은 진리의 영은 거룩한 세례 성사, 특히 견진 성사를 통해 내려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처럼 모든 거짓을 경계하며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정직해야 하며, 우리 마음에서 모든 기만과 거짓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제 여덟 번째 계명에 반하는 다른 두 가지 죄, 즉 험담과 중상모략에 관해 뭔가 말하고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여덟 번째 계명에 반하는 다른 두 가지 죄, 즉 험담과 중상모략에 관해 뭔가 말하고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중상모략과 험담으로 어떻게 죄를 짓는가
중상모략과 험담의 죄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웃의 명예를 훼손했을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중상모략과 험담으로 어떻게 죄를 짓는가
중상모략과 험담은 서로 다르므로 먼저 험담으로 죄를 짓는 이유를 설명한 다음, 중상모략으로 죄를 짓는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험담으로 죄를 짓는다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불필요하게 폭로할 때 험담을 하여 죄를 짓는 것이고, 이웃의 진짜 잘못을 불필요하게 떠벌릴 때 험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면 자신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됩니다. 이웃의 실수를 불필요하게 떠드는 사람은 사랑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도 남에게 원치 않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웃의 은밀한 잘못을 불필요하게 떠드는 사람은 정의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의는 무엇을 요구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정의는 남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도둑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부당하게 손상시킴으로써 정의에 반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의 은밀한 허물을 필요 없이 폭로한다면, 그는 이웃에게서 권리 없는 것을 빼앗는 것이고, 그는 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의 명예와 좋은 평판을 빼앗는 것은 도둑질보다 더 정의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예와 좋은 평판은 돈과 소유물보다 더 큰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정의는 남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도둑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부당하게 손상시킴으로써 정의에 반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의 은밀한 허물을 필요 없이 폭로한다면, 그는 이웃에게서 권리 없는 것을 빼앗는 것이고, 그는 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의 명예와 좋은 평판을 빼앗는 것은 도둑질보다 더 정의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예와 좋은 평판은 돈과 소유물보다 더 큰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존중받을 권리를 잃었다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으며, 자신의 실수가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 그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권리도 없습니다. 실수가 비밀이더라도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여전히 존경받을 권리가 있으며, 그의 실수가 널리 알려지거나 사람들에게 스캔들을 안겨 공개적으로 저지른 경우에만 그 권리를 상실합니다. 실수를 저지른 이웃이 존경받을 권리를 완전히 잃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의 명예를 앗아갈 권리는 없습니다. 이는 이웃의 잘못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금하는 성경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네가 무엇을 들었거든 무덤과 같으라."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들은 당신과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미친 사람은 무엇인가를 들으면 마치 산고를 겪는 여자처럼 분만통을 겪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마음에 있는 말은 허벅지에 꽂힌 화살과 같다" (시 19:10-12).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이미 해당 오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허용됩니다. 이 경우에는 사랑도 정의도 훼손되지 않는다. 오직 알려진 것만 말하고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없이, 단지 편안함을 위해 친구에게 자신이 겪은 불의를 폭로하는 것도 죄가 아니고 적어도 중대한 죄는 아닙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함에 대해 당국에 알리는 사람은 대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왜냐하면 부당함을 가한 사람은 피해자가 필요한 조언과 위로를 구하는 것을 반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조언이나 필요한 위로를 얻는 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당국에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의 실수
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이미 잘 알려진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실수는 그 행위 자체로 알 수 있습니다. 악행이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저질러져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경우, 또는 누군가가 세속적 또는 종교적 법원에서 위법 행위나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 범죄는 그것이 발생한 장소에서, 심지어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드러날 수 있다. 왜냐하면 공공연한 죄를 지은 사람은 더 이상 좋은 평판을 받을 권리가 없고, 아직 범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법원이 누군가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경우, 유죄 판결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도 범죄나 위법 행위가 다시 거론될 수 있습니다. 유죄 판결의 목적은 유죄 당사자를 처벌하여 그의 명예를 훼손하고 다른 사람들을 그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이미 잘 알려진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실수는 그 행위 자체로 알 수 있습니다. 악행이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저질러져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경우, 또는 누군가가 세속적 또는 종교적 법원에서 위법 행위나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 범죄는 그것이 발생한 장소에서, 심지어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드러날 수 있다. 왜냐하면 공공연한 죄를 지은 사람은 더 이상 좋은 평판을 받을 권리가 없고, 아직 범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법원이 누군가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경우, 유죄 판결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도 범죄나 위법 행위가 다시 거론될 수 있습니다. 유죄 판결의 목적은 유죄 당사자를 처벌하여 그의 명예를 훼손하고 다른 사람들을 그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어떤 경우에는 이웃의 비밀스러운 실수를 폭로할 수도 있고, 또 그래야 하는데, 특히 실수를 저지른 사람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중대한 실수를 했고, 그 사람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면 개선될 리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면, 먼저 비공개로 그 사람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만일 타당한 이유가 있어 이를 행할 수 없거나 훈계가 소용없을 때에는 그 사람의 개선을 구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사람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확증해 주셨습니다.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그를 꾸짖어라. 그가 당신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형제를 얻은 셈입니다. 만일 그가 당신의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러면 두세 증인의 증언으로 모든 것이 확증될 것이다. 그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보고하세요! "그러나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하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15-17)
따라서 이웃이 저지른 심각한 실수를 알게 된 사람은 누구나 이를 당국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는 처벌과 시정을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필요할 경우 비밀스러운 오류도 보고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개인, 가족, 지역 사회, 교회 또는 국가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실수를 알려준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지만, 알려주지 않는다면 사랑에 반하는 죄가 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에 대해 매우 분명한 예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속임수에서 구하기 위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을 공개적으로 폭로하셨습니다. 같은 이유로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대장장이 알렉산더의 악의를 밝혔습니다. "대장장이 알렉산더가 나에게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그를 조심하라. 그는 우리의 전파를 크게 반대하였느니라" (딤후 4:14-15)
따라서 직원이 고용주에게서 돈을 훔치거나 사기를 친 경우, 이를 발견한 사람은 고용주에게 알려서 직원이 더 큰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거룩한 가톨릭 신앙에 반하는 글을 퍼뜨린다면, 신자들은 사제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큰 해가 초래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웃의 은밀한 실수를 보고할 때는 언제나 좋은 의도로 해야 하며, 우리는 그것을 잘 기억하고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이웃의 실수를 신고하는 이유가 단순한 험담, 이기심, 싫어함, 증오, 시기심이라면, 우리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웃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으로 해야 하며, 이웃에게 이로움을 주거나 피해를 예방하려는 의도로만 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웃의 은밀한 잘못을 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나 해를 입은 사람에게만 알려줄 수도 있습니다. 이웃의 비밀스러운 잘못을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는 사람들 앞에서 떠드는 것도 불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소문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보도할 때에는 양심적으로 보도해야 하며, 진실을 엄격히 고수해야 합니다. 오류가 확대되거나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할 때, 사람은 사랑, 정의, 진실에 반하는 죄를 짓고 중상모략을 저지른 셈이 됩니다. 이웃의 실수를 누구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는 고해실 안이나 밖에서 고해사제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고해사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가장 잘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중상으로 죄를 짓는가
우리는 이웃이 저지르지 않은 실수를 꾸며내거나 이웃의 진짜 실수를 확대할 때 중상모략으로 죄를 짓습니다. 이 점이 험담과 중상모략의 차이입니다.
수다쟁이는 진실에 충실하고, 이웃이 실제로 저지르지 않은 나쁜 짓은 하지 않으며, 자신의 실수를 확대하지도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수다쟁이는 진실에 충실하고, 이웃이 실제로 저지르지 않은 나쁜 짓은 하지 않으며, 자신의 실수를 확대하지도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험담하는 자는 거짓을 말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가 금하는 곳에서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반면에 중상모략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이웃에게 자신이 범하지 않은 악행을 덮어씌우거나 자신의 실수를 확대시켜 실제보다 더 큰 처벌을 받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중상모략하는 자는 이웃의 명예를 빼앗고, 고의로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상모략은 덕에 반대된다.
사랑하십시오. 중상모략하는 사람은 이웃을 대하는 방식을 말하는 사랑의 법을 어기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중상모략하는 자는 부당하게 그리고 모든 권리에 반하는 방식으로 이웃의 명예와 좋은 평판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중상모략하는 사람이 무모하게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중상모략은 큰 악입니다. 실수를 만들어내어 이웃에게 돌리거나 실제 실수를 크게 확대하려면 사람의 타락하고 악의적인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상모략하는 자는 다음과 같다.
자기가 죄가 없는데도 이웃에게 어떤 악행을 돌리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웃의 진짜 실수를 확대하는 사람은 그 문제를 과장하여, 실제보다 더 추악하고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할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거룩한 가톨릭 사랑은 우리가 이웃의 실수를 허용할 때는 최소화하고, 이웃의 실수에 대해 말해야 하며, 확대해서는 안 되며, 가능하면 변명하거나 정당화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거룩한 가톨릭 사랑은 우리가 이웃의 실수를 허용할 때는 최소화하고, 이웃의 실수에 대해 말해야 하며, 확대해서는 안 되며, 가능하면 변명하거나 정당화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이웃의 실수를 진실인지 아닌지, 최종적인 것인지 의심스러운 채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동료 인간이 이런 짓을 했는지 저런 짓을 했는지 여전히 의심스러울 때, 실수가 영구적으로 증명될 때까지는 여전히 그 동료의 명예가 됩니다. 의심스러운 오류를 확실한 것처럼 제시하는 것은 진정한 중상모략이다. 왜냐하면 그러면 중상모략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동료 인간이 이런 짓을 했는지 저런 짓을 했는지 여전히 의심스러울 때, 실수가 영구적으로 증명될 때까지는 여전히 그 동료의 명예가 됩니다. 의심스러운 오류를 확실한 것처럼 제시하는 것은 진정한 중상모략이다. 왜냐하면 그러면 중상모략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웃의 어떤 좋은 행동이 악으로 해석되거나, 악한 의도로 여겨질 수 있겠는가!
이것은 가장 끔찍한 중상모략 가운데 하나이며, 사람 마음의 큰 악의를 보여줍니다. 이는 대체로 교만함, 복수심, 질투심, 그리고 비슷한 것들에 지배받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그는 이웃에게 어떠한 명예도 주고 싶어하지 않으며, 이웃이 자신에게 베푼 선행을 부인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선행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가장 끔찍한 중상모략 가운데 하나이며, 사람 마음의 큰 악의를 보여줍니다. 이는 대체로 교만함, 복수심, 질투심, 그리고 비슷한 것들에 지배받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그는 이웃에게 어떠한 명예도 주고 싶어하지 않으며, 이웃이 자신에게 베푼 선행을 부인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선행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이웃의 좋은 자질이나 미덕을 부인하고 폄하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런 사람은 이웃이 칭찬받는 것을 들으면, 그 칭찬을 반박하고 자신이 생각만큼 훌륭하지 않으며, 자신의 행동도 생각하는 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의 자질과 선행을 얕보고, 모든 면에서 이웃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이 칭찬받는 것을 들으면, 그 칭찬을 반박하고 자신이 생각만큼 훌륭하지 않으며, 자신의 행동도 생각하는 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의 자질과 선행을 얕보고, 모든 면에서 이웃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이웃의 선행이 칭찬받을 때 누가 침묵하겠는가!
이 사람은 침묵의 중상모략가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침묵을 통해 칭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침묵은 이웃에게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칭찬에 대해 심한 의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침묵의 중상모략가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침묵을 통해 칭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침묵은 이웃에게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칭찬에 대해 심한 의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그렇게 차갑고 강제적으로 칭찬하는 사람은 칭찬이라기보다는 꾸지람에 가깝다!
이런 칭찬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칭찬받을 가치가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런 중상모략가에는 먼저 이웃을 칭찬하다가 곧바로 이웃을 비난함으로써 이웃의 칭찬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이런 칭찬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칭찬받을 가치가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런 중상모략가에는 먼저 이웃을 칭찬하다가 곧바로 이웃을 비난함으로써 이웃의 칭찬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위에 언급한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험담과 중상모략으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웃의 허물을 필요 없이 폭로하는 것은 험담의 죄이고, 이웃이 저지르지 않은 허물을 꾸며내거나, 이웃의 진짜 허물을 확대하거나,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꾸어 이웃의 명예를 무고하게 해치는 것은 중상모략의 죄입니다.
중상모략과 험담의 죄는 무엇인가?
험담과 중상모략은 본질적으로 심각한 죄입니다!
하지만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저지른 모든 죄가 곧바로 중대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상모략은 험담보다 더 큰 죄입니다. 왜냐하면 중상모략하는 사람은 사랑과 정의에 반하는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진실에 반하는 죄를 지으며, 이웃이 저지르지 않은 실수를 양심 없이 꾸며낸다면 특히 악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험담과 중상모략은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는 중대한 죄입니다. 험담과 중상모략으로 인해 잃어버린 가톨릭 신도의 명예는 세상의 다른 모든 재화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서에 "좋은 이름은 많은 재물보다 낫고 은총은 은과 금보다 낫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잠언 22:1).
사람이 겪는 가장 크고 힘든 손실은 자신의 좋은 평판과 정직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때문에 정직함을 잃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슬퍼하다가 그런 상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누구도 부정직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심지어 가장 나쁜 사람조차도 정직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사악한 행동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종종 험담과 중상모략으로 인해 정직성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도 입게 됩니다. 이집트의 요셉은 그의 여주인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자유를 잃고 수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구주를 십자가로 이끈 것이 바로 그분의 적들의 중상모략이 아니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중상모략적인 말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더 이상 직장에서 발전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엄청난 비참함에 빠졌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중상을 당해 자신의 욕망을 결코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속적,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은 악한 말로 인해 정직성과 좋은 평판이 앗겨가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습니다. 험담과 중상모략의 결과를 살펴보면,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매우 엄하게 처벌하시는 매우 심각한 죄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중상을 당해 자신의 욕망을 결코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속적,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은 악한 말로 인해 정직성과 좋은 평판이 앗겨가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습니다. 험담과 중상모략의 결과를 살펴보면,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매우 엄하게 처벌하시는 매우 심각한 죄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험담과 중상모략이 항상 중대한 죄는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야 합니다. 피해가 사소하거나 중요하지 않다면, 험담과 중상모략은 사소한 죄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자신의 이웃의 명예를 약간 손상시킬 만한 말을 부주의하게 했다면 그것은 중대한 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험담과 중상모략이 중대한 죄인지 사소한 죄인지는 특정 상황에 따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그러한 상황입니다.
실수가 클수록, 언급되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의 평판이 좋을수록, 죄는 더 심각해집니다!
이웃의 더 중요한 위법 행위를 보고하는 사람이 사소한 위법 행위를 보고하는 사람보다 더 심각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험담이나 중상을 하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람일 경우 그 죄는 더 심각합니다. 지역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특별히 좋은 평판을 가진 사람이 정직함이나 좋은 평판을 잃으면 큰 피해를 입습니다. 또한 죄의 심각성은 누가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하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평판이 좋은 사람이 이렇게 하면, 일반인이 하는 것보다 듣는 사람에게 더 큰 인상을 남기게 된다. 평판이 좋은 사람이 무언가를 전하면 그것이 사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험담과 중상모략의 죄는 그 죄로 인해 초래되는 피해가 클수록 더욱 커집니다!
종종 사람의 정직함은 그들이 소유한 다른 재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정직함이 손상되면 다른 재화도 손상됩니다. 상인의 정직성이 깎이면 그의 사업은 곧 망할 것이고, 노동자의 정직성이 깎이면 아무도 그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을 것이며, 관리나 사제의 정직성이 깎이면 그는 더 이상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험담과 중상모략으로 인해 행복한 결혼생활이 방해를 받거나, 누군가가 능력을 갖추고 많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지위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물론 그런 말은 이웃의 영혼을 해칠 수도 있다. 사람은 자기의 명예와 좋은 평판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것에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열정에 굴복하여 온갖 악에 빠지게 됩니다.
험담과 중상모략의 죄악이 크거나 작은지 판단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했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정직함을 앗아간다면, 한 사람 앞에서 정직함을 앗아가는 것보다 더 큰 죄입니다. 저명한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 나쁩니다. 많은 사람은 가치가 낮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 것은 신경 쓰지 않지만, 존경받는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습니다.
험담이나 중상모략의 의도가 악의적일수록 저지른 죄는 더 크고 심각합니다!
험담과 중상모략은 단순한 수다에서 생겨나더라도 중대한 죄가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증오와 시기심이나 다른 악한 의도에서 생겨나면 훨씬 더 심각한 죄가 됩니다. 사소한 죄인 소문이라도 특별히 사악한 의도로 행해지면 중대한 죄를 지은 소문이 될 수 있습니다.
험담과 중상모략은 단순한 수다에서 생겨나더라도 중대한 죄가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증오와 시기심이나 다른 악한 의도에서 생겨나면 훨씬 더 심각한 죄가 됩니다. 사소한 죄인 소문이라도 특별히 사악한 의도로 행해지면 중대한 죄를 지은 소문이 될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사항은 험담과 중상모략의 심각성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안타깝게도 위에 나열된 죄만큼 흔한 죄는 거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대화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이웃에 대해 알고 있는 악행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악행을 이야기하고, 그보다 더 많은 악행을 덧붙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조차도 중상모략과 험담을 합니다. 이 죄를 짓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봐야 하고, 이웃에 대해 알고 있는 악행을 어떤 악행이라도 막고 어떤 선을 이룰 수 있다면 표현하겠다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웃의 미덕과 아름다운 자질에 대해 언제나 이야기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독이 있는 식물에서도 꿀만 골라내고 독은 남겨 두는 벌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해 반대하는 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말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즐겁게 듣는 사람은 모두 크고 중대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정심을 가지고 험담하고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의 말을 결코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더욱 악한 혀를 자유롭게 내밀게 될 테니까요. 우리는 얼굴 표정으로, 말로 그런 연설을 승인하지 않으며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또한, 험담을 막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지 않는 사람은 험담을 듣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또한, 험담을 막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지 않는 사람은 험담을 듣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최대한 사랑으로 예방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험담과 중상모략에도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웃의 명예를 모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에 대한 거룩한 가톨릭 사랑에 크게 어긋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명예를 빼앗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하며, 험담하는 사람의 말을 결코 듣지 말아야 합니다. 둘 다 죄이며 하나님 앞에서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필요한 모든 말에 대하여 엄중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명예를 훼손했을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웃을 험담하거나 중상모략하는 사람은 정직함을 회복하고, 초래된 모든 피해를 보상할 의무가 있습니다!
도둑질의 경우 훔친 것은 돌려주고 입은 피해는 보상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을 험담하거나 중상모략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에게서 훔친 정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재화를 회복하는 것보다 정직함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정직함이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교나 사제 어느 누구도 이 의무에서 면제시킬 수 없는 의무입니다.
도둑질의 경우 훔친 것은 돌려주고 입은 피해는 보상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을 험담하거나 중상모략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에게서 훔친 정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재화를 회복하는 것보다 정직함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정직함이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교나 사제 어느 누구도 이 의무에서 면제시킬 수 없는 의무입니다.
중상모략이나 험담을 한 사람이 고백성사에서 용서를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와 관계없이, 이웃에게 도난당한 정직함을 돌려주려는 진지한 의지가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부당하게 이웃의 목소리를 빼앗으면, 그가 저지른 죄에 더하여, 이웃에게 가해진 피해의 정도에 따라 보상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이를 이행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우리는 이웃의 명예가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인해 손상되지 않았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부당하게 이웃의 목소리를 빼앗으면, 그가 저지른 죄에 더하여, 이웃에게 가해진 피해의 정도에 따라 보상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이를 이행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우리는 이웃의 명예가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인해 손상되지 않았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단순히 수군거린 사람이나 진실한 실수를 말한 사람은 이웃의 정직함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실수를 철회하고 그 실수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거짓말을 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으로 인해 그는 이웃을 용서할 의무가 있으며, 가능하다면 다른 방법으로 그의 명예에 대한 보상도 해야 합니다. 그는 이웃이 인간적인 약함, 열정, 또는 사려없음으로 인해 그런 짓을 했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행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이었다면 분명 똑같은 일을 하거나 더 나쁜 짓을 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추가로, 그가 한 일을 후회하고 개선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같은 그의 좋은 점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이었다면 분명 똑같은 일을 하거나 더 나쁜 짓을 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추가로, 그가 한 일을 후회하고 개선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같은 그의 좋은 점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방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이웃에게 그의 명예와 명예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웃에 대해 거짓말을 한 중상모략가는 다릅니다. 이웃에게 단순히 사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상모략하는 사람은 말한 내용을 철회해야 합니다. 즉, 이웃에 대해 한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며, 이런 방식으로만 이웃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취소에서는 항상 악의적인 중상모략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이 비난받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중상모략을 한 사람이 자신의 중상모략을 인정하고 거짓말쟁이임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는 이웃의 명예가 회복될 수 없다면, 중상모략을 한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정의는 무고한 사람이 명예를 회복하도록 요구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명예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명예훼손이 공개된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 정의입니다.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할 의지가 없거나 능력이 없을 경우, 그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일으키거나 방조한 모든 사람은 그렇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도난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도둑이 훔친 물건을 돌려주지 않으면 도난에 가담한 모든 사람이 물건을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명예훼손이 공개된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 정의입니다.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할 의지가 없거나 능력이 없을 경우, 그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일으키거나 방조한 모든 사람은 그렇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도난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도둑이 훔친 물건을 돌려주지 않으면 도난에 가담한 모든 사람이 물건을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허락 하에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퍼뜨리거나, 이를 막지 못했거나, 막을 수 있었고, 막았어야 할 모든 사람은 이웃의 명예와 성실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특히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저지른 사람이 그렇게 할 의지나 능력이 없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소문을 듣기만 하는 사람, 소문을 퍼뜨리지 않는 사람, 소문을 막을 의무가 없는 사람에게는 존경을 표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웃에게 정직하게 갚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웃에게 정직하게 갚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발견된 범죄 사실이 다른 방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면!
이에 대한 한 예가 법적 유죄 판결입니다. 이 경우 이웃에 대한 좋은 평판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고, 불가능한 경우 누구에게도 의무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한 예가 법적 유죄 판결입니다. 이 경우 이웃에 대한 좋은 평판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고, 불가능한 경우 누구에게도 의무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발견된 범죄는 오랜 시간 때문에 모두가 잊어버렸고, 더 이상 아무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 범죄를 다시 상기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죄에 대한 기억이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연결된다면, 생명은 정직과 좋은 명예보다 더 큰 선이기 때문입니다!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이웃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철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사람이 죄인보다 먼저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이웃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철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사람이 죄인보다 먼저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장소의 거리로 인해 정직성에 대한 보상이 불가능하거나, 중상모략하는 사람이 중상모략을 한 장소나 중상모략을 한 사람들 앞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 구두로 철회가 불가능할 경우에는 신문에 서면으로 철회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합니다.
소문을 듣는 사람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면!
이 경우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하는 사람은 도둑질을 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던 도둑과 비슷합니다.
이 경우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하는 사람은 도둑질을 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던 도둑과 비슷합니다.
이웃이 자신을 용서한다면, 허락만 받으면 그 명예에 대해 보상할 것입니다!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어 스캔들이 일어나거나 공공의 이익에 해를 끼친 경우에는 같은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어 스캔들이 일어나거나 공공의 이익에 해를 끼친 경우에는 같은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명예에 대한 보상을 면제하는 이유들이다. 만약 이러한 이유가 하나도 없다면,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명예에 대해 보상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인한 모든 피해를 보상해야 합니다!
종종 험담이나 중상모략이 사용되면 정직성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다양한 피해를 입히게 되어 보상이 필요합니다. 이웃의 명예를 회복하기만 원하고, 입힌 피해를 보상하기 싫어하는 사람의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피해를 배상하는 것은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저지른 사람의 상속인에게 전가되는 의무입니다. 상속인은 험담이나 중상을 한 사람의 개인적 잘못이기 때문에 이웃의 명예를 보상할 의무가 없지만, 험담이나 중상을 한 사람의 물질적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상할 의무가 있습니다.
종종 험담이나 중상모략이 사용되면 정직성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다양한 피해를 입히게 되어 보상이 필요합니다. 이웃의 명예를 회복하기만 원하고, 입힌 피해를 보상하기 싫어하는 사람의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피해를 배상하는 것은 험담이나 중상모략을 저지른 사람의 상속인에게 전가되는 의무입니다. 상속인은 험담이나 중상을 한 사람의 개인적 잘못이기 때문에 이웃의 명예를 보상할 의무가 없지만, 험담이나 중상을 한 사람의 물질적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상할 의무가 있습니다.
선동에 대하여
선동은 매우 자주 발생하는 죄이며,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했거나 불쾌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누군가에게 알리거나, 말할 때 발생합니다. 이런 식으로 선동자는 불안과 불화를 조장하여 사람들을 갈라놓으며, 종종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 완전히 갈라져서 서로 원수가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선동하는 사람과 험담하는 사람은 둘 다 이웃에 대해 악담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둘의 차이점은 험담을 하는 사람은 이웃의 명예와 명예를 훼손하려 하고, 험담을 하는 사람은 이웃 사이의 화합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험담하는 사람은 이웃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중상하는 사람은 이웃에게서 다른 이웃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빼앗습니다. 즉, 중상하는 사람은 예전에는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 사이에 불화를 낳습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선동가는 자신의 이웃에 관해, 특히 다른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하게 만들고 사랑을 잃게 할 만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자는 불화와 증오를 퍼뜨리고, 배우자와 형제와 동료와 이웃을 갈라놓고, 신하들이 윗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고, 오직 악과 불행만을 퍼뜨릴 뿐입니다.
험담하는 사람은 이웃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중상하는 사람은 이웃에게서 다른 이웃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빼앗습니다. 즉, 중상하는 사람은 예전에는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 사이에 불화를 낳습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선동가는 자신의 이웃에 관해, 특히 다른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하게 만들고 사랑을 잃게 할 만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자는 불화와 증오를 퍼뜨리고, 배우자와 형제와 동료와 이웃을 갈라놓고, 신하들이 윗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고, 오직 악과 불행만을 퍼뜨릴 뿐입니다.
선동은 보통 불성실함, 허위, 아첨, 자기애, 시기, 증오, 보복 등 다른 죄악을 수반합니다. 선동자는 종종 모든 것을 날조하며, 그의 질투와 복수심은 그의 사악한 의도를 이루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생각되면 중상모략에 의지하게 만든다.
이런 사악한 자들은 다윗을 사울 왕의 은총에서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왕의 원수라고 거짓 보고하였고, 다윗 자신이 사울에게 불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윗이 당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은 어찌함인가?" (삼상 24:10)
이런 사악한 자들은 다윗을 사울 왕의 은총에서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왕의 원수라고 거짓 보고하였고, 다윗 자신이 사울에게 불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윗이 당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은 어찌함인가?" (삼상 24:10)
하나님의 눈에 선동은 사악하고 저주받은 범죄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확인됩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여섯 가지요, 그의 마음에 가증히 여기는 것이 일곱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와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꾸미는 마음과 악으로 달려가는 데 서두르는 발과 거짓을 쏟아내는 거짓 증인과 형제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자니라" (잠언 6:16-19).
일곱 번째, 곧 "형제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자"는 형제들 사이에 불화를 조장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자에 대해 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얻고자 한다면, 마치 이웃에게 험담을 하거나 중상모략을 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이웃에게 입힌 피해를 보상해야 합니다. 이 죄가 그 자체로, 그리고 그 결과로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는지 아는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 이 죄를 피해야 합니다. 그는 불화를 조장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온 세상 형제들 사이에 평화와 화합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의무상 필요할 때에만 그는 편견 없이 자신이 들은 것을 말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선동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며, 그들의 그물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아첨이나 다른 사악한 의도에서 이웃에 대한 뭔가를 그에게 말하는 사람은 쫓아내고, 그가 그들의 수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자녀를 둔 부모라면 자녀에게 선동이 얼마나 해로운지 가르쳐야 하고, 자녀가 그런 짓을 저지르면 엄중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비난에 대하여
비난이나 조롱은 매우 자주 일어나는 죄이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비난이나 조롱의 죄는 어떤 사람이 그럴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면전에서 비난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혹스러운 일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는 경우에 저지릅니다.
비난은 험담과 다릅니다. 비난은 이웃이 있는 자리에서 하는 반면, 이웃에 대한 험담은 이웃이 없는 자리에서 하는 것입니다. 험담은 도둑질과 같고, 중상모략은 강도질과 같습니다.
비난은 험담과 다릅니다. 비난은 이웃이 있는 자리에서 하는 반면, 이웃에 대한 험담은 이웃이 없는 자리에서 하는 것입니다. 험담은 도둑질과 같고, 중상모략은 강도질과 같습니다.
험담은 비난과 다릅니다. 험담은 존경심을 떨어뜨리고, 비난이나 조롱은 이웃의 명예를 파괴합니다. 조롱은 무위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고, 행위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태만은 이웃에 대한 존중심으로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발생하고, 행위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웃에게 그들의 명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발생합니다.
조롱과 비웃음도 비난과 조롱에 속합니다. 조롱은 누군가의 말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웃음과 조롱을 불러일으킬 때를 말합니다. 이것은 사울의 딸 미갈이 언약궤를 옮기는 축제 때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기쁨에 춤을 추던 다윗을 진심으로 조롱했을 때 한 말입니다. 그녀는 다윗에게 이렇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께서 오늘 얼마나 존귀하게 행하셨는지요. 마치 백성이 옷을 벗는 것과 같이, 그 종들의 여종들의 눈앞에서 옷을 벗으셨습니다!" (삼하 6:20).
여호와께서는 미갈이 다윗을 향해 허용한 조롱을 싫어하셨고, 그래서 그녀에게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는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불쾌감을 주지 않는 무해한 농담은 허용됩니다. 때로는 허영심이 강하고 거만한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조롱하는 것이 필요하고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를 어리석은 거만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의도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사제, 독실한 사람, 종교, 그리고 신에게 바친 것들이 공개적으로 조롱을 받고, 부모와 존경받을 만한 다른 사람들이 조롱을 당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죄이며, 심지어 대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불경한 혀로 가장 신성하고 명예로운 것들을 조롱하는 자들은 양심에 무거운 책임을 지우는 가장 역겨운 자들입니다. 누군가를 손짓이나 몸짓으로 조롱하는 것은 더욱 죄악입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예수의 등에 왕의 붉은 옷 대신 붉은 군용 망토를 두르고, 그의 손에 홀 대신 갈대를 쥐어주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왕으로 맞이했을 때 그를 조롱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신, 헌신한 사람, 지도자 또는 눈먼 사람, 귀머거리, 말 못하는 사람, 미친 사람과 같은 불행한 사람을 이렇게 조롱한다면, 이는 특별히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에 대한 두려움, 연민, 사랑의 마지막 불꽃마저 꺼진 사악한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티오크 사람들의 그런 조롱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벌하시는지에 대한 끔찍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주민 대부분은 불경한 총독 아스테리우스의 사주를 받아, 매우 존경받는 그레고리 주교가 거리에 나타날 때마다 그를 조롱하며 공격했고,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진흙과 돌을 던지는 일이 잦았으며, 극장과 무대에서 그에 대한 가장 부끄러운 모욕을 노래했다. 이런 행동 때문에 아스테리우스는 직위에서 해임되었지만 얼마 후 다시 본래의 직위로 복귀했습니다.
589년 10월 31일에 귀국하던 날, 그는 명망 있고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했습니다. 마을 사람 전원이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하했다. 하지만 밤 3시쯤 갑자기 끔찍한 지진이 발생하여 교회, 궁전, 공공 주택과 개인 주택이 파괴되었습니다. 안티오크의 3분의 2는 폐허가 되었고, 결혼 잔치의 기쁨 속에서 아스테리우스는 신부와 모든 손님들과 함께 무너진 궁전의 잔해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 사고로 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충실한 종에게 가해진 모욕을 얼마나 끔찍하게 복수하시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가까운 사람을 모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사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충실한 종에게 가해진 모욕을 얼마나 끔찍하게 복수하시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가까운 사람을 모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비난이나 조롱은 이웃의 신체적, 도덕적 잘못과 단점에까지 확대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낮은 지위, 부모나 친척의 범죄, 못생긴 몸매, 기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비난하는 것도 조롱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저지른 악행을 비난하거나, 누군가를 거짓말쟁이, 사기꾼, 도둑, 간통범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롱입니다.
누군가의 낮은 지위, 부모나 친척의 범죄, 못생긴 몸매, 기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비난하는 것도 조롱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저지른 악행을 비난하거나, 누군가를 거짓말쟁이, 사기꾼, 도둑, 간통범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롱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르고 저주하는 것 역시 조롱입니다. 화가 나면 이웃의 얼굴에 무언가를 던지고, 모욕과 저주를 퍼붓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싸움, 부상, 살인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장기간의 적대감과 분쟁이 발생하여 법정에서 많은 비용이 들고, 종종 온 가족이 파탄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욕설과 조롱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악을 말하고 저주하는 것도 매우 죄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라카!'라고 말하는 자는 대의회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를 '미친놈'이라 부르는 자는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다" (마태복음 5:22)
조롱의 죄는 비난받는 잘못이 클수록, 조롱을 받는 사람의 지위와 명예가 높을수록, 마지막으로 조롱을 하는 의도가 나쁠수록 더 심각합니다.
상관이 부하직원의 실수를 꾸짖어 바로잡을 의도로 대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때조차도 허용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진지하게 훈계하는 것은, 마치 지도자가 부하직원을 훈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그들을 구하기 위해 허용되고 의무인 것입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진지하게 훈계하는 것은, 마치 지도자가 부하직원을 훈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그들을 구하기 위해 허용되고 의무인 것입니다.
이웃을 어떤 식으로든 모욕한 사람은 누구나 보상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만족은 공개적으로 또는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모욕이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정 방법은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적합해야 합니다. 만약 모욕이 지도자를 향한 것이라면, 특히 지도자가 용서를 구한다면,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모욕이 부하직원을 향한 것이라면, 그 사람에게 사과를 하거나, 그를 찾아가거나, 다른 방법으로 그에게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 예의에 맞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자신을 해친 사람에게 복수하면, 더 이상 만족을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해를 입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조롱에 중상모략이 수반되었거나 실수와 비난이 조작되고 거짓이었다면 만족을 얻는 것 외에도 이웃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하고 거짓 비난은 철회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비난하여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주하거나 욕설을 퍼붓지 말고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즉, 우리는 온유해야 하고, 사랑의 정신으로 모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꾸지람을 들었을 때 꾸지람하지 않고 오히려 원수와 꾸지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했던 주님이라는 롤모델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를 따라야 하며, 사도 베드로의 훈계에 따라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모범을 따라 원수들에게 축복을 베풀어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십시오. 이를 위해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으려 함이니라!" (베드로전서 3:9).
거짓 또는 허위 의심에 대하여
거짓되거나 허위의 의심과 사악하거나 그릇된 판단은 본질적으로 여덟 번째 계명에 반하는 내부적 죄이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 험담이나 중상모략처럼 외부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충분한 타당한 이유 없이 거짓 의심으로 죄를 짓고, 이웃을 악하게 생각하며, 누군가가 악을 저지르거나 저지를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고 유추하는 사람은 거짓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무언가가 사실이라는 확고한 판단이 아니라, 의심하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의견일 뿐입니다.
의심에는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이성적인 의심은 우리가 이웃에 대해 나쁜 짓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발생합니다. 이런 의심은 합리적이며 죄가 아닙니다.
의심에는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이성적인 의심은 우리가 이웃에 대해 나쁜 짓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발생합니다. 이런 의심은 합리적이며 죄가 아닙니다.
불합리한 의심은 충분한 이유 없이 이웃에 대해 나쁜 의심을 갖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심이 거짓이거나 잘못된 의심입니다. 대죄가 아니더라도 거짓되거나 그릇된 의심은 항상 죄입니다. 사랑과 정의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거룩한 기독교적 사랑에 어긋납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덕성과 의로움을 이유 없이 의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웃에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 의심은 또한 정의에 반대되는데, 정의는 이웃이 합법적으로 소유한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존중하는 것처럼 우리 이웃을 존중해야 합니다. 마치 누군가가 이유 없이 다른 사람 앞에서 정직함을 앗아가면 그 이웃에게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정당한 이유 없이 그 사람에 대한 좋은 평가를 잃는 것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거짓 의심에 대해 경고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마음에 악을 꾸미지 말라. 거짓된 저주에 키스하지 마세요. "나는 이 모든 일을 미워하노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슥 8:17)
거짓된 의심은 종종 많은 죄를 낳는다. 우리가 이웃이 이러저러한 악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의심하면 우리는 그에 대한 존경심이 거의 없고, 그에게 차갑게 대하며, 종종 우리의 의심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함으로써 그에 대해 험담하거나 중상모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타당해 보이는 의심이 결국 거짓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웃이 불필요하게 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곧바로 잘못된 의심을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의 사실이 증명되거나 죄책감이 들 때까지 오랫동안 이웃을 좋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웃을 완전히 맹목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경험에 따르면 많은 이웃이 전적으로 정직하지 않으며, 우리 이웃을 속여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해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며, 그런 행동은 죄가 아니며 오히려 권장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들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라" (마태복음 10:16)
부모와 지도자, 그리고 주인이 자식과 신하를 너무 믿지 않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큰 악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그들을 망칠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때까지는 모든 사람에 대해 좋은 의견을 가져야 합니다. 거짓되거나 잘못된 의심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릇되거나 사악한 판단에 대해 훨씬 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충분한 이유가 없는데도 악이 진실하고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실에서 반영됩니다.
그러므로 거짓 의심과 거짓 판단의 차이는 거짓 의심을 하는 사람은 단지 악한 의견을 갖고 있을 뿐 이웃이 이러저러한 짓을 했는지 의심하고 이웃이 무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거짓이나 악한 판단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견을 확실한 것으로 여기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짓되거나 잘못된 의심과 사악하거나 잘못된 판단은 항상 충분한 이유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의심과 마찬가지로, 판단은 충분한 이유가 없이 내리는 경우에만 잘못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도둑으로 알려진 사람이 도둑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려지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악한 소문도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을 오로지 겉모습만 보고 악하다고 여기고 판단한다면,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틀린 일이다. 판단할 만한 충분한 이유와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잘못된 판단이나 악한 판단에 대하여
잘못되거나 사악한 판단은 잘못된 의심이나 거짓된 의심보다 진실과 정의에 더욱 반대된다. 왜냐하면 말한 악한 일이 확실한 것으로 여겨질 때 이웃의 정직성이 더 심각하게 훼손되기 때문인데, 이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의심할 때보다 더 심각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은 매우 불의하고 파괴적입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심하게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을 판단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네가 누구냐" 고 말합니다. "그가 서거나 넘어지는 것은 그의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는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4).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말로 우리는 이웃이 선하든 악하든 관계없이 이웃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책임을 져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위에 따라 이웃을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도 같은 진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곧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니라." "그런데 당신은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합니까?" (야고보서 4:12)
이웃을 그릇되게 판단하는 자는 자신이 충분한 지식이 없는 문제에 대해 판단하는 자로 자처하게 된다. 그의 판단은 이웃의 의도나 행위 중 하나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의도를 판단한다면, 그는 허용된 것 이상을 나아가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의도란 내적이고 숨겨진 것으로, 마음과 정신을 살피시는 전지전능한 신만이 온전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적, 영적 판단자는 내적인 의도와 생각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판단은 이웃의 외적인 행동에만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이웃의 진짜 의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속을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좋은 의도로 행해졌지만, 언뜻 보기에 악해 보이는 행위는 선을 나타낸다. 이러한 작품은 겉모습이 흉측하고 추했던 언약궤와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염소 가죽으로 덮여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귀중하고 신성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웃의 행위가 언뜻 보기에 악해 보일 때, 그 이웃에 대해 즉시 악한 생각을 품는다면 불의가 저질러지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적절한 조사도 없이 누군가의 무책임한 대화에 근거해 그 사람을 유죄 판결을 내리는 판사와 비슷해집니다. 그런 판사는 이웃을 그릇되게 판단하기 때문에 열정적이고 불의한 사람으로 판명날 것입니다.
사실, 참으로 선하고 정직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선하고 정직하다고 여깁니다. 좋은 사람은 이웃에 대한 판단을 가장 적게 하는 반면, 나쁜 사람은 이웃에 대한 판단을 가장 많이 한다. 교만, 시기, 증오, 편파성, 싫어함은 항상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에 굴복하는 사람은 이웃의 선행을 악하다고 판단하고, 이웃은 결코 그를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가장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관대하게 판단하며, 그들의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사람만은 용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된 의심과 거짓된 판단이 우리에게서 사라지도록 진실하고 거룩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다!"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판단받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6:3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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